1. 작품 소개

에르완 실드베르 르 블랑.

자매를 죽이고 발루아와 대륙의 중심을 휘어잡은 여왕.

바스티안 샤른호르스트.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잘리어의 부흥기를 이루어 성군이라 칭송받는 대제.

야경이 아름다운 밤, 여왕이 잘리어에 은밀하게 방문했다.

“잘리어를 방문한 이유는 따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저는 여인과 단둘이 사석을 갖지 않는데.”

“저는 여인이 아니라 국왕입니다.”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여자의 몸이지만, 국왕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까부터 국왕으로서 앉아 있었는데 폐하께서는 남자로 앉아 계셨나 봅니다.”

모든 것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홀로 지고지순한 왕.

당신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도 꼿꼿할까.

2. 작가 소개

주연

트위터 @doutormocha

3. 차례

Prologue

1부. Roll the dice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4. 미리 보기

“그나저나 여왕께서 이리 직접, 저희 잘리어를 방문하신 연유에 대해 여쭙고 싶은데.”

마침 그가 물어왔다.

“이렇듯 은밀하게 방문하실 정도면 중대한 이유겠지요.”

“그건…… 공석이 아닌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상념을 털어버리고 에르완이 허리를 곧게 폈다. 샤른호르스트 2세에 대한 개인적 감상보단 잘리어에 방문한 본래 목적만을 상기하려 애썼다.

“이런, 저는 여인과 단둘이 사석을 갖지 않는데.”

“저는 여인이 아니라 국왕입니다.”

“…….”

“여자의 몸이지만, 국왕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까부터 국왕으로서 앉아 있었는데 폐하께서는 남자로 앉아 계셨나 봅니다.”

상대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일순 일그러지는 듯했다. 에르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 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드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따라오지 마라, 후베르트.”

에르완은 앞장서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기를 적시던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점점 사그라졌다. 회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예를 갖추는 심복들도 줄어들 즈음, 그늘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방이 나왔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공허한 복도를 울렸다.

“이 정도 자리쯤이면 되겠습니까?”

에르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경계의 빛이 완연했다. 바스티안이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며 팔짱을 꼈다.

“이곳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말씀하셔도…….”

“혹 로마노프 어를 하실 줄 아십니까?”

“예?”

“할 줄 아십니까?”

물음 자체가 로마노프 어였다. 에르완이 답을 구하는 눈으로 바스티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열린 입에서는 여왕과 같은 언어가 흘러나왔다.

“물론입니다.”

로마노프는 무려 반세기 전에 지도에서 사라진 변방의 소국가다. 그들이 다스리는 두 나라뿐 아니라 부르군트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특이하게도 로마노프는 소민족답지 않게 자기들만의 언어를 썼는데, 문법이 까다롭고 외국인에게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아 배우기 쉽지 않았다. 적어도 이 대륙에서는 이제 그 언어를 아는 이는 다섯도 되지 않았다.

에르완은 로마노프 어로 대답이 돌아온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듣기로 샤른호르스트 2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라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떻게 사어(死語)에 능한가.

“자, 이제 지나가는 이가 있어 엿듣더라도 그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의 목소리가 궁금증을 잘랐다. 습관적으로 남자의 눈을 좇았다. 대제의 눈 안에 은밀하게 새겨진 기색이 읽혔다. 흥미로움.

“이렇듯 비밀리에 방문하고, 저와 사석을 만들고, 아무도 없는 공간조차 믿지 못해 로마노프 어까지 써가면서 해야 할 말씀.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잠깐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제안을 정말 해도 될까. 답지 않은 망설임이 발목을 잡았다. 제안해야 하는 이유, 거절당했을 때의 해결책, 다른 협상안. 수많은 생각이 제 길을 찾아 갈래갈래 퍼져나갔다. 그 끝은 항상 조국과 백성의 안녕에 닿아 있다.

왕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무모할지라도 해야만 한다.

에르완이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저는 이 잘리어에, 저희 발루아 군대를 들여놓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적막을 꿰뚫었다. 마치 그녀의 귀에는 메아리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바스티안은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웃고 있었다.

“이건 꽤 급작스러운데요.”

본디 무감각했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늘어졌다. 고결하게 뒤집어썼던 껍질이 한 꺼풀 들렸다. 눈빛이 순식간에 요요해졌다.

“전쟁 선포치고는 말입니다.”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해지는 미소가 위험천만하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보다 냉정했다. 어쩌면 이자의 본모습이 살짝 드러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돋아나는 적의.

“전쟁 선포를 이곳까지 행차하셔서 친히 알려주시다니.”

“…….”

“이거 참,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산등성에 내려앉는 노을처럼 목소리가 느리고 무겁다.

이쯤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서야 했지만 에르완은 입을 여는 대신 상대를 관찰했다. 반쯤 풀린 눈매와 빈틈 많은 어투, 그리고 비뚤게 기울어 있는 자세까지. 협상을 하려면 상대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출구 없는 미로 앞에서 입구만 바라보고 서 있는 것 같다.

“좋은 걸 가르쳐주셨으니 저도 유용한 정보를 하나 알려드리지요.”

창문을 등지고 선 바스티안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잘리어는 외국끼리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역사가 오래인, 중립국입니다. 군대가 있다 하나 전쟁 경험이 전무하니 그 전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테지요. 잘리어의 모든 게 바뀔 것입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철학자는 입을 다물 것이고 시인의 노래는 멈추겠지요. 여자고 남자고 노인이고 어린이고 가릴 것 없이 죽을 것이고…… 어쩌면 저는 식민지의 꼭두각시 왕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리되지 않기 위해 저항은 할 테지만, 판도를 바꿀 정도는 되지 않을 겁니다. 경험 없는 지휘관에 경험 없는 군사라. 그야말로 곡괭이로 바위를 치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말을 끊고 슬쩍 웃었다.

“하지만 저는 말입니다, 잘리어는, 저희에게 속한 영토를 넘보려 든다면 그것이 곡괭이든,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잔이든 집어 들고 싸울 겁니다. 부러진 곡괭이로도 바위에 간 금을 찾아 부술 순 있으니까. 만일 패전한다 해도 저희가 잃을 병력의 반 이상은 물어뜯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 뜻을 오해하셨습니다.”

에르완이 마침내 침묵을 깨었다.

“그렇다면 제가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다만 충분하셔야 할 겁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 관찰당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완이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었다. 로마노프 어를 아는 걸 보면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교육을 받지 못한 건 아닐 텐데, 하는 모양새를 보면 또 정반대다. 이제껏 만나왔던 수많은 협상가 중 가장 난해한 경우였다.

“……작금 발루아가 처한 상황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대 발루아 왕이자 폐하의 아버지이신 실드베르 3세께선 퍽 야심만만한 분이셨지요. 전쟁을 이용해 빛 한 줄기 들지 않던 발루아를 반(反) 부르군트 세력의 중심축으로 만드시기도 했고.”

“그때 일어난 전쟁이 끝나질 않고 있습니다.”

“일 년 전이던가, 프리드리히 왕이 조약을 임의로 파기하고 군대를 국경으로 내려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 수가 삼만사천입니다. 그들은 연맹국 각각의 국경에 자리를 펴고 알리아 일부 영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지니 연맹국 전체에서 반발이 심한 상태입니다.”

“가장 약소국인 알리아를 건드렸으니…… 목적은 뻔하군요.”

“그들은 반 부르군트 연맹국의 내부분열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리아를 내주면 그것이야말로 프리드리히 왕의 뜻대로 되는 것이겠지요. 왕은 제 뜻을 미리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요구했든 내주지 않을 것이란 걸.”

“그 후로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졌을 테고 연맹국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겠군요?”

“저는 슬슬 그들의 뜻에 순순히 따라줄 생각입니다.”

“알리아를 버린다는 겁니까? 의외로군요.”

“그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돌아가는 프리드리히 왕의 함대를.”

“우리 잘리어의 도버 해협에서 매복하여 전멸시킬 것이다? 여왕께서 절 찾아온 이유는 도버 해협에 들일 군대와 함선을 허락받기 위해서였고.”

속내를 읽힌 에르완이 적잖이 놀란 얼굴로 바스티안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머리가 좋다고.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손짓에서 그의 목소리가 묻어나왔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전략입니다. 도버 해협은 함대가 빠져나갈 유일한 길목이고 중립국인 잘리어에 속해 있으니 방심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을 테고. 부르군트의 힘은 거대한 무적함대에서 나오니 그것들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프리드리히는 오리알 신세가 될 테지요.”

“전멸이 과욕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을 약화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잘리어에는 충분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존경하는 여왕 폐하. 그 정신 나간, 허무맹랑한 계획을 정말 실행시킬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더는 부드러울 수 없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움츠러들고 눈치를 보았을 은근한 강압이었지만, 상대는 평생을 무장으로 살아온 에르완이다. 모진 풍파로 다져진 꼿꼿함. 그것으로 되물었다.

“어째서 허무맹랑합니까?”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텐데요.”

“폐하의 모든 생각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녀는 돌아 들어오는 희롱을 가볍게 무시했다. 바스티안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암묵에 묻어갈 수 있었던 속내를 제 입으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생각은 언어로 정의되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유치하고 천박해지곤 했다.

“모든 무모한 계획엔 위험을 감당할 만한 이유 또는 이득이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 제가 하는 생각이 그런 부류였다.

바스티안이 말끝을 끌었다. 진심인 듯 아닌 듯 빠져나가는 화술을 구사하는 걸 즐기는 그로선,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언짢았다.

“그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왕께서 잃을 게 많습니다.”

“제가 무엇을 잃습니까? 그 전에,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쟁이야말로 여왕께서 다스리는 발루아를 강대국으로 올려준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발루아는 자원의 보고, 수많은 무기를 연맹국에 팔면서 벌어들인 수익이 왕실에선 무시할 수 없을 정도겠지요.”

“인정합니다.”

“왕실도, 물러난 섭정도, 발루아의 모든 대신도 전쟁을 바라고 있을 겁니다. 대주교까지 전쟁에서 공적을 올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공언하는 상황에 여왕께서만 전쟁이 종결되길 바란다?”

“…….”

“폐하께서 얻으시는 건 유감스럽게도, 오로지 발루아 전체의 반발뿐입니다. 어쩌면 폐하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할지 모를.”

“듣던 대로 과연 계산이 철저하십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철저하고 많은 계산 중 하나 빠진 것이 있습니다.”

에르완이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바스티안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빠졌다? 하나가 빠졌다? 무엇이? 국제 정세? 발루아 내부 사정? 군대? 물자? 용병? 함대? 무엇이 빠졌지? 무엇이?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바가 없다.

“제가 제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빠져 있습니다.”

잠시 후 에르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뜻밖이라 바스티안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저 표정으로, 뭐?

“저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그들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제 마음이…….”

“웃기는군, 그런 걸 믿으라고!”

바스티안이 또 다른 사멸한 언어, 로타링기에 어(語)로 크게 소리 질렀다. 하도 기가 막혀 제 속내를 터뜨리긴 했지만, 곤란하지 않았다. 저 여왕이 무표정한 걸 보니 필시 알아듣지 못한 모양…….

“폐하께서 믿든 안 믿든 진실은 진실입니다.”

젠장. 로타링기에 어도 안단 말인가.

바스티안은 다른 의미로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