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혹시 괜찮으면 가끔 나랑 밥 친구 해줄래요?”

따뜻한 봄날, 단 한 번 스쳐 지나갔던 지연과 재헌은 서로를 맘에 품고 있다 1년 후 운명처럼 재회한다.

지연이 너무나 예뻐 오히려 망설이는 재헌, 재헌이 너무 좋아 자꾸만 다가가고 싶은 지연.

스위치를 켜야만 무엇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게 언제 시작될지 때때로는 모르는 것처럼, 그들도 스위치를 켜야만 하는 걸까. 그걸 딸칵, 하고 올려야 제자리걸음 중인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을까.

“앞으로 모르는 남자 미행 금지.”

짧게 닿았던 입술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렇게 신경 쓰이게 혼자 밥 먹지도 말고.”

허리를 감싸 안은 그가 그녀를 조금 더 자신의 앞으로 당겨놓았다.

“……좋아해.”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한마디.

“이제 못 물려.”

2. 작가 소개

푸른소리

세련되지만 익숙하게. 그러나 조금은 독특하고 시선을 이끌어내는.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이야기.

그래서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

푸른빛의 엉성한 울타리(疏籬)를 통해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사람.

3. 차례

#13. 비밀연애 = 나 빼고 다 아는 연애

#14. 고백

#15. 고백, 그 다음 날

#16. 그와 그녀의 거리

#17. 청문회

#18. 그녀의 졸업식

#19. 어머, 실수

#20. 그녀의 주사

#21. 그들의 일상

#22. 사랑의 등불을 밝혀서

#Epilogue

#외전 1

#외전 2

#외전 3

#외전 4

4. 미리 보기

“근데 아저씨. 그러고 보니 내가 아저씨 여자친구라고 주장하기 전에 우리, 해야 될 얘기가 있지 않나?”

또다시 그를 놀리는 듯한 말투. 속으로 아차 싶으면서도, 그걸 따질 때는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재헌의 표정이 조금 복잡했다.

“중요한 일이 뭘까?”

지연은 말꼬리를 잡아 빼며 다시 한 번 그를 놀렸다. 그녀도 그에게서 중요한 말을 빨리 듣고 싶은 기대와 긴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해 결국 분위기를 장난스럽게 끌고 가는 것일 뿐이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조금은 원망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던 재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너랑 있으면 뭐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질 않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 손으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대꾸 없이 웃고만 있었고, 그도 그녀를 따라 자연스레 웃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작은 손과 함께 손장난을 치던 손이 약간 흘러내려온 그녀의 옆머리를 가볍게 거둬 올렸다.

“……오늘 예쁘네.”

여전히 운전대에 기대고 있는 그가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해주고 싶었던 말을 내뱉는 입술이 괜히 간질거렸다. 그냥 농담처럼 건넬걸, 하는 후회. 나이가 들수록 진심을 말하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간질거림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옮겨가 심장에 달라붙었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싶어 헛기침을 하면서도, 살며시 올라오는 기쁜 마음에 배시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한 치장을 알아봐주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녀가 그의 손을 다시 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괜스레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가 접었다가, 쓸데없는 장난만 쳤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건 두 번의 짧은 입맞춤. 살짝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닿으며 그가 그녀의 윗입술을 한 번, 아랫입술을 한 번씩 머금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가 그녀의 뒷목을 받쳤다.

빠앙! 뒤에서 울린 짧은 클랙슨 소리와 동시에 둘의 눈이 반짝 떠졌다.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신호. 그러나 정작 경적을 울렸던 그 차는 그들의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짧은 웃음이 터졌다. 그가 그녀에게 이마를 꽁 부딪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못내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이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결국 저녁식사 장소로 향하는 내내 어색한 공기, 어색한 웃음, 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 시간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그가 예약해둔 레스토랑에 도착해서도 둘은 그렇게 내내 어색했다. 아마 첫 데이트보다 오늘이 더 어색한 거 같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같은 것밖에 묻지 못하는 그에게, 그녀도 ‘응, 좋아.’ 하는 짧은 대답뿐.

“좋아?”

“좋아.”

같은 말을 묻고 대답하는 것 따위의 유치한 질문과 대답은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애매할 정도였다.

스테이크를 썰면서도 서로 눈만 마주쳤다 하면 어느 쪽에선가 웃어버리는 통에 대화는 이어지질 못했다.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테이블이란 애매한 거리는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을 갈구하기에, 신발 앞코가 닿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내 거 먹어볼래요?”

그렇게 여자가 한마디 툭 던지며 포크로 콕 집은 스테이크 한 점을 건네면,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서 포크를 입에 넣었다.

“나도.”

그녀가 그의 신발코를 톡 차며 얼굴을 가까이하면,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입에 고기를 한 점 넣어줬다.

결국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섣불리 꺼내지 못하는 겉도는 대화뿐. 그러는 사이, 고기가 너무 작았던 것인지 어쩐 건지……. 몇 번인가의 타이밍을 재던 남자와 같이 타이밍을 생각하고 있던 여자는 별달리 특별한 일을 만들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가 ‘왜 그 타이밍에서 그렇게 대꾸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만 조금씩 남기면서도 팔짱을 낀 서로의 체온이 따뜻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헤어질 수 없었기에 후식을 핑계로 댔고, 앞을 가로막는 테이블이 싫어 시끄럽다는 핑계로 테이크아웃이라는 귀찮은 짓까지 골라 했다. 할 것도, 갈 곳도 없었기에 그의 집으로 향했고, 그렇게 온갖 핑계를 갖다 붙이며 도착한 곳임에도 긴장감만 짙어졌다.

분위기나 잡아볼까. 노트북으로 로맨스 영화를 켜놓고 나란히 앉았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한 지 오 분도 되지 않아, 영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해야 할 말만 머릿속으로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그가 코트를 벗을 때 주머니에서 꺼내왔던 약간은 기다란 상자 하나.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운을 뗐다.

“지연아.”

“응?”

부른 이도, 대답하는 이도 무슨 장면인지도 모르겠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혹시 말이야……. 나중에 그냥 네 또래들 만날 걸 그랬다고 후회하지 않을까?”

그에게 가장 무거운 이야기가 모니터 위로 가볍게 흐르자, 고개를 돌린 건 지연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옆모습만 확인하고 그녀도 다시 눈길을 돌렸다.

“내가 말 안 했어?”

대답을 하는 목소리는 그의 질문보다도 훨씬 가벼웠다.

“나 원래 취향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연상의 남잔데.”

대답의 방식도 너무나도 가벼웠다.

“얼굴도 내 취향. 나이도 내 취향. 목소리도 내 취향. 성격 같은 건 좀 더 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진 내 타입이고.”

그러나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은 말만 전하고 있었다.

“내가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대놓고 내 취향 저격이라고.”

당신의 그런 콤플렉스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는, 정말로 사소한 것이라고.

“그 말 진짜였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재헌이 웃음기가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의 가장 큰 고민이 너무 쉽게 해결되는 것이 허탈했다.

오늘도 그가 선뜻 그녀에게 중요한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던 것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가 아까 보았던 그녀의 친구처럼 그녀의 또래가 아닐까, 하는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배려인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건 그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는 것.

재헌은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 물건을 어떻게 전해줘야 하는지 몰라 멋없이 케이스째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갑자기 들이밀어진 물건을 떠넘기듯 받은 그녀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 이리 와.”

결국 쑥스러운 듯 마른세수를 한 그가 그녀에게서 케이스를 다시 받아와 그 안에서 꺼낸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주얼리를 여자에게 선물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취향을 모르겠다며 항상 직접 고르게 했었다.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보겠다고 혜영에게까지 물어가며 이런 짓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습게도 그 원인은 방금 사라져버린 그 열등감이었지만.

여전히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지연은 자신의 목에 걸린 조그만 하트 모양 펜던트와 그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조금 상기된 채 한숨만 내쉬던 그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저기 잠깐만 아저씨. 나도 아저씨한테 물어봐야 될 게 있어서 그래.”

그러나 지연은 거기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엉뚱한 소릴 내뱉었다.

“그 있잖아, 저번에 우리 밥 먹었을 때, 아저씨가 어떤 여자 때문에 밥 천천히 먹는다고 그랬잖아. 그 여자랑은 무슨 사이야?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쉬지도 않고 쏟아진 그 질문은 그의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 질문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고, 깨닫고 나서야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던 것인가 싶어 가벼운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눈웃음을 지은 그가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지연아. 내가 너 처음 봤을 때 느낀 건데, 너 참 미행에 소질 없더라.”

그는 긴 손가락으로 갸웃거리는 그녀의 목에 붙어 있던 작은 밴드를 떼어냈다.

“밥은 또 어찌나 천천히 먹던지.”

아직 남아 있는 멍 자국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멍하니 있던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을 때, 재헌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부드럽게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 모르는 남자 미행 금지.”

짧게 닿았던 입술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입술을 조금씩 건드렸다.

“그렇게 신경 쓰이게 혼자 밥 먹지도 말고.”

놀랍다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남자는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 허리를 감싸 안은 그가 그녀를 조금 더 자신의 앞으로 당겨놓았다.

“……좋아해.”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한마디.

“이제 못 물려.”

낯간지러운 고백의 끝을 장난스럽게 장식한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러나 지연은 고개를 돌리며 그의 입술을 피했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러나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저기 아저씨.”

지연이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한 번만 더 말해줄래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못 들은 척 그에게 뻔한 대사를 했다.

“싫어.”

이미 얼굴이 붉어진 그가 그 요구를 들어줄 리는 만무했지만.

“내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 그거!”

“됐어, 이미 들었으니까.”

억울하다는 듯이 외치는 지연에게 재헌이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지연을 보고, 재헌은 설명을 해줄 생각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바짝 끌어당겨 앉혔다. 다시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고, 그녀도 그를 이기지 못하는 척 이번에는 조금 오래도록 서로를 탐했다.

‘그런데 우리 순서가 조금 많이 바뀌지 않았어요?’

그 말을 할까 하던 지연은 이내 관두었다. 더 전에 물었어야 했던 질문들이 오늘에야 오고 갔다. 더 전에 주고받았어야 했을 고백을 오늘에야 주고받았다. 분명 순서는 엉망진창임에도,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으니까.

우연한 만남에, 계획에도 없던 스위치가 켜졌다. 생각 없이 들어와버린 스위치라서 어떻게 꺼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마구잡이로 딸깍거리고 있었다. 가끔은 켜졌다가 가끔은 꺼졌다가. 그러는 사이 서로의 불빛을 알아봤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달뜬 숨과 함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와 고백을 서로에게 건넨 것은 생각해보면 그제야 첫 스위치가 켜진 것이었다. 그동안 스위치를 숱하게 켜왔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좋아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들의 스위치는 열심히 달칵거릴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