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매끄럽게 나아가며 반응하다니.’
‘그러니까 사람이 조정하려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고양이 같이 민감하게 굴어야만 할 테니까.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다가는…….’
전화벨이 울리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는 트래비스 댄버스는 미지의 바다 속을 오랫동안 잠수하다가 떠오른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청록색 눈동자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는 짧은 황갈색 수염을 매만지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바람과 선체와 바다와 항해의 끊임없이 변하는 상호작용을 떠나, 지금 주어진 이 현실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책상 근처의 열려진 창문으로 바다 냄새와 소리가 몰려왔다. 트래비스의 관심을 끌기엔 어떤 말보다 더욱 효과적이었다. 산타아나 바람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안개를 카타리나 섬까지 몰아갔다. 땅 위의 것들이 모두 청동색이었다. 막바지 여름이 눈부셨다. 파란 바다가 끊임없이 출렁이며 가물거렸다.
그는 바다 저쪽에 있어야 했다. 잔뜩 부풀린 돛을 단 ‘바람의 전사’가 바람을 뚫고 출렁이는 것을 느끼며.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트래비스는 까다로운 기계를 노려보았다. 그는 대체로 전화를 싫어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핑크.’
‘유치. 도대체 사촌은 집을 개장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부활절 달걀? 아니면 보육원?’
여덟 번째의 전화벨이 울릴 때 트래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무시하고 컴퓨터의 가상세계로 빠져들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는 배가 항해 도중, 아무리 사소한 바람의 움직임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아홉 번째.
그는 투덜거리면서 가장 최근의 디자인을 저장했다. 그리고 큼직한 손으로 유치한 핑크빛 전화기를 들어올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구요?」
「이런, 댄버스! 무슨 전활 그렇게 받나?」
트래비스는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즉시 흥분이 가라앉았다. 로드니 해링턴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럼, 어떻게 받지? 내 사촌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라구.」
트래비스가 말대꾸를 했다. 그리고 길고 껑충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러면 정말 라구나 비치에 있는 건가? 난 티에라델푸에고나 다른 외진 곳을 기대하며 전화한 게 아닌데.」
해링턴이 기쁜 듯이 물었다.
「라구나 비치네. 온통 핑크색이야. 전화까지.」
「뭔 소린가?」
「내가 지난번에 다녀간 후에 사촌이 집을 개장했지. 핑크! 핑크! 사방이 핑크빛이야. 다시 말해? 핑크뿐이라구!」
「핑크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건가?」
「그렇지. 아, 라벤더도 있군.」
「음, 보고 싶은데. 자네가 핑크빛 빌라에서 축 늘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군.」
「그러니까 이리 오라구.」
트래비스가 농담을 받았다.
「자넬 귀빈실에 모시지. 차양 달린 줄무늬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 방으로.」
해링턴이 낄낄거렸다.
「‘바람의 전사’ 선체를 퓨셔(바늘꽃과의 관상용 관목) 아래에서 다시 페인트칠을 한다는 말인가?」
「내가 배를 다시 칠하는지 알고 싶어서 전활했군?」
「맞아.」
「그럼, 끊지.」
「사실은 ‘바람의 전사’가 데뷔를 위해 단장을 마쳤나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네.」
해링턴이 웃음을 터뜨리며 재빨리 말했다.
「해링턴, 자넨 어떤가?」
트래비스는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핑크빛 전화기를 보며 말했다.
「나야 핑크빛 인생이지.」
「이런 젠장! 좋겠……군.」
트래비스는 등과 어깨를 쭉 폈다. 그리고 컴퓨터 때문에 웅크렸던 상체를 비틀었다. 뼈가 다부진 그의 긴 몸은 육체 노동에 알맞았다. 오랫동안 아침 수영을 해오지 않았다면, 그는 매혹적인 컴퓨터 앞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지 못할 터였다.
「내 배가 데뷔라니? 알다시피 처음 있는 일이 아니잖나?」
「자넬 주목하도록 만들 책자를 내자는 내 아이디어를 기억하지? 자네의 배와 설계도 등을 실어서 말야.」
트래비스는 기억했다.
「갑자기 목이 아프군! 아니, 아랫배가 아파!」
「어서 일어나 걸어보라구!」
해링턴이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신은 우리 몸을 움직이라고 만들었지, 컴퓨터를 위해 만든 게 아니잖나. 굉장한 사진작가를 만났네!」
트래비스는 그가 전화를 건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날렵해 보이는 몸만큼이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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