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살아서 이 작은 천국을 얻고자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을 선택했다.”

아일 에드가 클레이모어.

그리고 그의 기억을 가진 남자, 서정현.

“만약에 아니라면요……. 제가 그녀가 아니라도 이렇게 잘해주실 건가요?”

라야 윈터스.

그리고 모두가 그러하듯 천칙(天則)에 의해 기억을 묻어버린 여자, 한지은.

정현이 말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를 해올 때는 언제고.”

지은은 이제 더 이상 삼킬 침도 없었다. 목만 옴짝거렸다.

“아, 사랑인 줄 착각한 상대만 애가 타는 건가?”

정현은 정말 상처받았다는 듯이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전생의 기억과

현세의 추억이 교차하는 곳,

나달의 언덕.

2. 작가 소개

아드소

여름에 태어났지만 더위에 약합니다. 여름밤은 좋아합니다.

제가 활자로 옮긴 인물과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도 잠깐의 재미, 또는 오랜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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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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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6

#32

#33

#34

#35

#36

part. 7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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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 보기

라야는 마음먹은 대로 되어가지 않는 상황에 상심했다. 미안해하는 아넷에게 라야가 더 미안해서 그녀 앞에서는 표정을 밝게 하려 했지만, 아넷은 용케 그 속을 알고 더 미안해했다.

아넷은 라야에게 일부러 반나절 정도 휴가를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서재든 시내든 뛰어갔을 테지만 이날은 정말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라야는 붉은 벽돌의 저택에서 챙겨 온 목검을 들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건물 뒤편으로 갔다.

“쥬네에게 편지를 써야겠어.”

누군가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세르노다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신선한 배움과 새로운 인연 등에 대한 기대로 시작되었던 세르노다의 생활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괜히 크게 기대했다. 막연한 호감은 이래서 무섭다.

백부의 가족도, 얼마 없는 친구들마저도 주변에서 없어지자, 라야는 가족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서러워졌다.

검술 수련을 하고, 땀이 나고, 숨이 차고,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숨을 고르는 동안은 자신의 처지를 잊을 수 있었다. 목검으로 연습을 할 때에는 단검으로 할 때보다 덜 눈치가 보였다.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 띈다 해도 실제 검이 아니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아일에게 고마워졌다.

“일취월장은 아니더라도 퇴보하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속말에 대꾸하는 듯한 목소리에, 라야는 공중에서 굴러 떨어지듯 급작스럽게 춤을 멈추었다. 심장이 정말 쿵 하고, 휘청하는 주인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으려는 줄 알았다.

“또 마음 가는 대로 휘두르고 있군.”

거짓말.

라야는 거짓말, 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비록나무 아래는 아니지만 어떤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팔짱을 낀 채 클레이모어 저택에서와 같은 자세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라야는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은 엉거주춤 자세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환영이 아니었다.

정이란 게 이렇듯 무섭다. 고작 한 달도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매일 봐왔다고, 저 예민하고 위험하고 건방지고 우울하고, 때론 말도 못하게 무뚝뚝하고, 어떨 땐 반대로 잔소리가 심하고, 이기죽거려서 화를 돋우는 데는 선수고, 하지만 심약한 어머니가 상처를 보면 혹여 비위 상해할까 봐 그녀 앞에서는 항상 붕대 감긴 팔을 숨기는, 하는 일에 맞지 않게 섬세한 저 사내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미운 정도 정이니까. 딱한 양반이다 생각하는 것도 마음을 주는 것이었다.

라야는 그의 목소리에 코가 시큰해진 게 자존심이 상해 뿌루퉁한 얼굴을 했다.

최근 라야는 사람이 몸으로 하는 뭔가를 함께 하면 대화만 나눌 때보다 훨씬 강력한 유대감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사랑 없이 그저 성욕만으로 관계를 나누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깟 검술 좀 배웠다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남녀가 몸으로 사랑을 나눈 뒤엔 어떻게 될까.

“넌 이상한 생각을 하면 그런 표정을 지어.”

인내심 있게 라야의 대꾸를 기다리고 있던 아일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을 지은 뒤에는 항상 엉뚱한 소리를 하더군.”

“……정말 미남이에요, 라든가, 애정 결핍이라고 한다든가.”

“그래.”

라야가 목검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가 올 생각이 없어 보여서 아일이 라야 곁으로 다가갔다.

“잠깐만요.”

라야는 아일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이더니 다리를 절뚝거리며 근처 바위로 걸어가 앉았다. 이제 보니 그녀의 한쪽 신발 밑창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지나간 길에 붉은 점이 점점이 흘러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일은 핏방울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가온 아일은 라야가 뭐라 할 새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라야는 놀란 감정을 살짝 커진 눈에만 담았다. 아일은 서슴없이 라야의 발목을 잡아 신발을 벗긴 후 발을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돌이 여린 발바닥을 찢은 모양이었다.

라야가 괜찮다는 듯이 밝은 기색으로 말했다.

“떨어진 신발을 억지로 고쳐 신고 있었더니 결국 다쳤네요.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놀라게 만든 아일 탓이 반이에요.”

책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늘 하듯이 던진 농담인데 그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처럼 대꾸가 없었다. 라야가 농담조로 말했다.

“업고 가달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아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손으로 그녀의 발바닥에서 모래를 털어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피가 나는 부위에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바위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라야는 얼굴과 뒷목이 후끈 달아올랐다.

절대, 한 번도 이 남자가 다친 사람에게 이런 다정하다고까지 느껴지는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라야는 숨듯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가 잡고 있는 발목이 조금 뜨거웠다. 다친 건 발바닥인데.

아일은 손수건으로 발을 묶은 뒤 라야를 보았다. 고개를 든 그는 동요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사무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라면 이런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라야가 얼굴을 반쯤 가렸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부터 들을래요?”

“……좋은 소식.”

“에른스트에서 저를 정식 학생으로 못 받아주겠대요. 하지만 이번 입학 희망자 중에 그래도 여자가 여섯 명이나 돼서 정식 학생은 아니지만 청강은 할 수 있게 해주겠대요.”

“그게 어떻게 좋은 소식이야.”

“상대적으로 좋은 소식이에요.”

“나쁜 소식은?”

“저희 여학생들의 청강을 허락하겠다는 교수가 없어요.”

“…….”

아일이 가볍게 콧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간, 라야는 놀란 눈을 끔벅였다. 손을 털고 일어선 그가 위로하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남자에게 하듯이 조금은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다. 쓰다듬는다기보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데 가까웠다. 제자나 후배쯤을 쓰다듬는 손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