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나는 당신의 오직 하나뿐인 반려입니다.

선무가의 후계자이자 천인의 피를 지닌 남자, 선무도윤. 절명의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준 것은 그와 함께할 운명을 지닌 소녀인 유진의 부친이었다. 목숨을 구한 대가로 도윤은 감정을 잃어버리지만, 유진의 미소는 그의 마음에 작은 자리를 남기는데…….

“유진.”

도윤이 자신의 심장이 뛰는 곳에 유진의 작은 손을 끌어다 놓았다. 

“지금도 나는 여기서 덜컹 소리가 났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것은 온기와 격렬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

“너 때문이다. 나의 유진.”

“나의 유진?”

믿기지 않아 유진이 반문했다. 

“그래, 넌 내 것이지. 완전히.”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 또한 네 것이야, 유진.”

2. 작가 소개

이서윤

maroooo00@paran.com

착실한 직장인에서 일탈을 꿈꾸고파 글을 시작한 소심쟁이. 

꿈은 이뤄진다(夢想成眞)라는 믿음을 가진 낭만주의자.

해피엔딩이 좋아 로맨스를 쓰는 해피엔딩 마니아.

작가연합 ‘깨으른 여자들’에서 활동. 

▣ 출간작

『안개 속에 숨다』

『왈가닥 결혼하다』

『태양의 제국』

『프레지던트』

『매화우』

『비연』

『독감』

『해후』

『그 여자, 그 남자를 만나다』

『화흔』

『효월』外 

3. 차례

무극

序

1. 첫 번째 재회

2. 천인의 기록

3. 무극, 그리고 현운재

4. 녹우(綠雨)

5. 성인식

6. 무심, 그리고 인력(引力)

7. 몽계산

8. 열망

9. 그믐의 연(戀)

10. 상실

11. 전령

12. 짧은 해후

13 별리(別離)

14. 5월, 장미의 이름

15. 회귀

終

4. 미리 보기

유진의 작은 손이 별채의 방문을 살짝 열었다. 텅 비었던 별채에는 지금 환자가 들었다. 그 새벽에 정신 잃은 소년을 업고 급하게 뛰어왔던 아저씨는 정작 본인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건 모르고 있었다. 소년은 지금껏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차라리 멀쩡해 보였다. 

“으응?”

어린 유진의 눈에 괴로움에 몸을 뒤트는 소년이 보였다.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

온몸을 경련하듯 뒤틀어 버리니 유진이 순간 놀라 방으로 뛰어들었다. 저도 모르게 소년의 몸에 손을 뻗었다. 

“앗, 뜨거!”

그러나 다음 순간, 유진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창백한 얼굴과 달리 소년의 몸이 불덩이인 탓이었다. 아이다운 천진한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어떡하지? 도윤 오빠 몸이 진짜 뜨거워. 어떻게 해줄까, 오빠?”

유진이 조심스레 무릎걸음으로 다가섰다. 요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깊고 깊은 산골이었지만,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평소에도 아버지인 기훈에게 병을 고쳐 달라 오는 손님들이 간혹 있었다. 그래서 아픈 손님이 신기할 것도 없는 아이였지만, 오늘 들이닥친 아저씨와 도윤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1년 만에 보는 것이어서 반가웠지만 또한 어딘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들이 오고 나서 아버지는 대문을 걸어 잠갔다. 누구의 방문도 거절한다는 뜻이었으니, 덕분에 오늘 별채인 휴한당(休閑堂)은 이름처럼 하루 종일 고요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부산했다. 

큰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하루 종일 집 안에는 깰 수 없는 침묵만이 흘렀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반가웠던 도윤은 이렇게 내내 정신을 못 차리고, 정작 피를 흘리던 아저씨는 아버지와 종일 방 안에만 있었다. 

조막만 한 손이 소년의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들었다. 열이 오른다며 올려둔 그것이 또다시 바짝 말랐다. 유진은 곁에 둔 얼음 물통 속에 수건을 담갔다 짜서 도윤의 이마에 올렸다. 열을 재듯 방금 얼음통에 담갔던 손을 그의 얼굴에 대어 봤지만, 뜨거워서 금세 떼었을 정도였다. 

“왜 이렇게 열이 안 내리지?”

시무룩이 중얼거리던 유진이 도윤의 앞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이목구비가 반듯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윤 오빠, 우리 유현 오빠 어디 있는 줄 알아요?”

1년 전, 아버지는 오빠가 무극과는 다른 바깥세상으로 공부하러 갔다고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동생인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떠날 오빠가 아니었다. 

“오빠가 빨리 깨나면 좋겠다.”

유현의 친구인 도윤은 분명 유현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빠 얘기만 나오면 버럭 화를 내는 아버지와 달리 그는 친절하게 알려줄 것 같다. 언제나 그는 친절했으니까. 그런데 1년 만에 보는 그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니, 어린 유진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찼다. 

그때였다. 

“내 손으로 네 종족의 피를 말려 죽……일 것이다. 감히 내 아버……지를……네놈 따위가…….”

소년이 눈을 번쩍 떴다. 순간 핏빛 안광이 번뜩여 마치 불꽃이 튀는 듯했고, 으드득 갈린 이 사이에서 토막 난 말들이 쏟아졌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유진의 여린 숨을 조였다. 

“아, 아…….”

단단한 팔뚝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유진의 목을 움켜쥔 후였다. 소녀의 여린 목 줄기를 움켜쥔 손이 조여들수록 유진의 커다란 눈이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숨이 막혔다. 숨을 쉴 수 없이 조여든 악력, 눈앞에서 뜨거운 불처럼 이글대는 소년의 눈만큼이나 작은 유진의 얼굴빛이 붉게 변했다. 머리끝으로 피가 몰려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사, 살려……, 허헉!”

온몸이 타버릴 듯 밀려드는 열기. 그제야 어린 소녀의 눈에도 보였다. 천천히 허공을 향해 올라간 도윤의 한쪽 손에서 이글거리며 강기(剛氣)의 덩어리가 타고 있었다. 불처럼 벌겋게, 혹은 눈처럼 허옇게 타고 있는 그것이 조금씩 그녀를 압박해 왔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열기. 그에게 힘없이 매달린 어린 소녀의 애원은 그대로 열기에 뭉개져갔다. 

“오, 오빠……, 아, 안 돼! 하, 하지 마!”

“죽어!”

탁!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윤이 강한 힘을 내뱉으며 쳐들었던 팔을 유진을 향해 내려친 순간,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빙편(氷片)이 그의 팔을 쳐냈다. 

쿠쿵!

연이어 따라온 장풍에 등을 가격당한 도윤이 허리를 꺾었다. 검붉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지니 하얗던 이부자리가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쿨럭거리며 그가 쏟아낸 선혈의 열기가 방 안을 뜨겁게 덥혔다. 마치 지옥불의 열기 같았다. 

“도련님!”

뒤늦게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윤철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말을 잊었다. 온통 붉은 피로 물든 이불 위에 피범벅이 되어 죽은 듯 엎드려 있는 도윤과 그 앞에 딸인 유진을 안은 기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경이 막힌 딸의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는 기훈을 보며 윤철이 넙죽 엎드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스스로 저 안의 기운을 감당하기엔 도련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본신의 힘을 제압하지 못한 채 이 고통을 못 이기고 깨어나시면, 그때는 세상이 혼란해집니다. 제발…….”

그의 바람이 간절했다. 천 년 만에 깨어난 붉은 용의 기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그것으로 고통 받고 있는 작은 주인을 위해 윤철은 몸을 낮췄다. 한순간에 상대를 하얀 불길 속에 몰아넣던 작은 주인의 능력을 눈앞에서 보고 경외감에 몸을 떨던 순간이 되살아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윤철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 세상이 소멸될 수도 있었다. 그 이후 작은 주인 또한 산화할 것이다. 

“이제 다시는…….”

그때 유진을 조용히 내려놓은 후, 도윤을 반듯이 누이고 맥을 살피던 기훈이 입을 열었다. 표정은 한없이 담담한데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았다. 

“도련님의 따뜻한 웃음은 볼 수 없을 겁니다. 한기가 서기(暑氣, 더운 기운)를 덮을 테니까요. 또한…….”

윤철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기훈과 도윤을 함께 향했다.

“본성을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도련님은 극양과 극음, 세상에서 가장 독한 것을 몸 안에 쌓아두시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건 나도 모릅니다.”

윤철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최악의 상황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 인간의 감정이 그 안에서 길을 잃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감정이 사라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윤철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사라질 수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심연 저 아래로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만, 기억하는 일에 대한 감정은 잃으실 겁니다.”

“감정이 사라진다는 의미겠군요.”

“단순히 사라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치 태고와 같은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순정한 몸과 마음 안에서 모든 기운이 조화를 이뤘을 때,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것이다. 기훈이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소년의 가슴에 댔다.

“으으…….”

기절하여 늘어졌던 소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서늘한 하얀 기운이 뭉글거리며 솟아나 소년의 가슴으로 쉴 새 없이 빨려 들어갔다. 

“차라리 기억에 대한 감정이 없으신 편이 나으시겠죠. 아버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 고통을 기억하신다면…….”

윤철이 눈을 감으며 몸을 떨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살이 얇게 발리고, 기어이 뼈까지 조각조각으로 깎이던 주인의 마지막이 뇌리에 가득 찼다. 눈알이 파이기 전,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안타깝게 말했다. 

ㅡ 아들, 눈을 감아. 더 이상 보지 말아라.

ㅡ 아니요. 제 뼈에 새길 것입니다. 결코 잊지 않고 백배 천배로 갚아줄 겁니다.

하지만 기어이 숨이 끊어진 부친의 모습에 소가주 도윤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흐흑, 아버지! 도윤 오빠가 나 잊어버렸나 봐. 날 죽이려 했어요.”

작은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기훈은 가냘프게 눈을 뜬 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다. 아프니까 그런 거야.”

“치료 받으면 감정이 없어져요? 나를 좋아했던 것도, 내가 좋아했던 것도 이제 다 잊은 거예요?”

“그런 건 잊는 게 아니다, 유진아. 아니, 잊는다 해도 다시 널 기억하게 하면 되는 거야.”

빙긋, 딸을 향한 웃음을 끝으로 기훈은 소리 없이 아이의 혈을 짚어 잠을 재웠다. 서서히 굳은 그의 표정에 비장함이 서렸다. 동시에 윤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워 있는 도윤을 대신하여 기훈을 향해 사부의 예를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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