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제대로 얘기 좀 하자. 너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

“저기…… 성유야. 그거 고백 아니었는데.”

손님과 업주, 피고용자와 고용인,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로 지난 3년 동안 관계가 휙휙 변한 우성유와 소해금. 그러다 어느 순간, 둘은 연인이 되었고 전남친, 전여친이 되어버렸다.

성유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을 떠나 포르르 날아가버린 전여친이자 절친을 찾아 독일로 향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마음일 수 없어졌다. 아니, ‘가벼운 마음인 척’할 수 없어졌다.

이제야 겨우 발견한 진심을 오롯이 서로에게 내보일 수 있을까.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만났어?”

“만나야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안 만나면 못 헤어질 것 같았으니까.

“헤어지려고 날 만났다는 거야?”

“맞아. 우성유 너랑 헤어지고 싶어서, 그래서 만났던 거야.”

“…….”

“빨리 해치워버리려고.”

2. 작가 소개

유나리

취미로는 싫어서 노력껏 열심히 씁니다.

3. 차례

#9. 요요연연

#10. 반짝반짝 빛나고 따끔따끔 아파오는

#11. We might kiss

#12. 천천히 인사하는 사람들

#13. 세상 모든 아름다운 단어에서 당신을 떠올린다

#14. 그다음의 날들

#외전. 비행기는 안 돼요

4. 미리 보기

“나는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전부 다 했어. 벌써 예전에.”

그녀는 정말로 다 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로, 그게 성유에게 하고픈 말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네 생일에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잘 살고, 담배는 좀 줄이고, 답장은 하지 마.]

한때 우성유를 싫어하면서 사실은 좋아하던 소해금. 그녀는 그를 좋아하는 자신이 싫어졌다가 결국엔 그런 자신조차 좋아하게 되었었다.

신기했다. 사랑은 소름이 끼칠 만큼 모순적이었다. 늘 비참함과 희열이 함께 붙어 다녔다. 그따위 양가적인 감정을 알게 한 성유가 싫었고, 그러나 역시 좋았다.

해금은 성유를 그냥 조금 조금 좋아했다. 조금 많이도 아니고 아주 조금도 아니고 그냥 조금 조금. 그렇게 조금 조금 좋아하다가, 어느 날 문득 제정신이 들거든 관두려고 그랬다. 그래서 이별이 다가왔을 때도 한 점 미련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그토록 무력하고 무기력한 체념 속으로 해금을 밀어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성유였다.

아마 성유는 영원히 모르겠지. 이따금 그가 해금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는지.

그가 간혹 어두운 표정으로 해금을 찾아와서,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시간만 때우다 갈 때면,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의 괴로움에 해금이 어떠한 무력감을 느꼈는지, 그 안에 얼마나 깊숙이 처박히곤 했는지. 성유는 절대 짐작조차 못 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도 이토록 설운 얼굴로 해금에게 따져 물을 수 있을 테지.

“그게 다라고? 겨우?”

성유가 목울대를 쥐어짰다. 해금은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즉각 허탈한 중얼거림이 되돌아왔다.

“잘 살고, 담배는 좀 줄이고, 답장은 하지 말라고.”

너무 정확하게 외우는 성유를 보자 해금은 왠지 사족을 달아야 할 것 같았다. 아니야, 그 전에 미안하다는 얘기도 썼잖아. 그래봤자 해금 또한 성유와 마찬가지로 엽서의 내용을 외우고 있단 고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침묵했다.

“고작 그게 다였다는 거지……, 네가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그는 아주 천천히 곱씹었다. 그리고 그 긴 되뇜이 무색하리만치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스윽, 양손으로 허벅지를 짚은 성유가 그대로 허리를 구부렸다. 단지 순간의 몸짓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너른 몸이 훌쩍 접혔다.

그는 문턱도 없는 욕실 앞에 쪼그려 앉았고, 손등으로 얼굴을 쓸기 시작했다. 마른 살결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바스락댔다. 그러나 금방 축축한 습기에 잠식됐다.

해금은 머뭇거리며 반대로 돌아섰다. 자리를 피해주고자 했다. 성유가 창피해하지 않도록. 하지만 곧 그의 부름에 붙잡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게 이런 뜻이었어?”

흠뻑 젖어,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나쁜 새끼. 소해금, 넌 진짜 못돼 처먹은 새끼야……. 알아?”

“…….”

알아. 해금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난을 듣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성유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꾹꾹, 짓씹어 말했다.

“야……. 그때 네가 한 말이 이런 뜻인 줄 알았으면 나는…….”

“…….”

“난 절대로 너한테 그런 거짓말 안 했어. 절대로…….”

성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꼴사납게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남자애 앞에서, 해금은 그가 후회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순간은 그들의 지난날에 단 하루밖에 없었으니까.

“우리 그냥 계속 친구 하면 안 돼?”

“그래.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

“그건 왜?”

“그건 어쩔 수 없잖아.”

그때다.

“내가 아무리 성유 너를 아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네 행복을 바란대도,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어.”

그래, 그들의 관계는 이미 그때 멈췄고 고였고 메말랐다. 진실로 단 일 초도 되돌릴 수 없었다. 아무리 완벽해도 흉내는 흉내일 뿐.

당연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해금이 성유를 끊어내지 못한 이상, 또 그런 고백을 들어놓고도 성유가 그런 거짓말을 했던 이상.

누구보다 자유롭고, 무책임하고, 거짓말을 잘하던 우성유. 그래서 누구보다 신비롭고, 재미있고, 소해금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우성유.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비롯됐다. 진작 그와 절교했어야 했는데.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매 순간 실망하고 다음 순간 체념하면서 곁을 맴돌았다. 어느 날 문득 제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데 끝까지 안 돌아오길래, 언제나 몽롱한 채로 그를 조금 조금 사랑하고 있길래, 죽기 전에는 반드시 헤어지고 싶어서.

“미안해, 우성유.”

해금이 말했다.

무엇이 미안하느냐 따진다면 결국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 이 순간엔 진심이었다.

“……아냐.”

불현듯 성유가 몸을 일으켰다. 스러지는 불처럼 비틀거리며 해금에게 다가왔다. 떼어낸 손끝에는 아직 물기가 어린 채였다. 젖은 손으로는 차마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는지, 그보다 더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가까이 붙어 섰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과했다.

“내가 진짜 잘못했어, 해금아.”

“…….”

“평생 네 옆에서 갚을게. 똑똑한 네가 한 번만 더 이해해주면 안 될까?”

머리 위에서 더운 숨이 왈칵 떨어졌다. 해금은 성유가 또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해금의 뒤통수를 끌어안고서 머리에 제 턱을 댔다. 해금으로선 성유에게 안겨 있는 상황보다 그의 우는 얼굴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 더 무서웠으므로 가만히 몸을 굳히고 있었다.

조심스레 감겨오던 체온이 점점 빠듯하게 물밀듯 들이닥쳤다. 곧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됐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성유의 손가락이 오갔다. 그때마다 흐느끼는 숨소리가 함께였다.

“너도 나한테 말 안 해줬잖아. 난 몰랐단 말이야…….”

이 자식은 뭐가 항상 이렇게 어린아이 같을까. 해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리광에 안쓰러움을 느끼는 자신을. 저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남자애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그러나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기껏 들어올린 두 팔은 엉거주춤하게 허공에 머무를 뿐이다. 와중에 성유는 끊임없이 해금의 머리에 제 뺨을 문질렀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울지 마, 성유야.”

해금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위로도 명령도 아닌 어설픈 설득이었다. 성유가 퍽이나 설득당했을 리 없다. 그는 더욱 애타게 매달렸다.

“정말 나한테만 알려주는 거라고 말했어야지.”

“…….”

해금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런 말이라면 분명히 했는걸. 분명 성유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알 때까지 몇 번은 더 알려줬어야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면서.

“성유야, 그만해. 나 이제 괜찮아.”

해금은 기계적으로 성유를 달랬다. 뻣뻣한 몸짓으로 성유의 등을 다독였다. 그럴수록 성유는 더욱더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던 일순 해금을 와락 고쳐 안으며 말했다.

“너 혼자 둬서 미안해. 잘못했어.”

“이러지 말라니까?”

“네가 알아달라고 했는데, 모른 척해서 미안해.”

“……그만해.”

“네가 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내가…….”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그만 좀 해!”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퍽! 해금은 성유를 밀어냈다. 그러나 포박당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씩씩댈 뿐이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래, 넌 자꾸!”

이런 역겨운 기분. 뇌가 통째로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어쩌면 해금은 아주 먼 과거에 진작 고장 난 채로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성유는 해금과 다른 의미로 고장 난 사람 같았다. 그의 몸은 너무 뜨거웠다. 새벽녘 차가웠던 손끝이 이제는 불에 덴 듯 홧홧했다. 방금 전까지 빌빌거리던 말투도 대번 날카롭게 변했다

“젠장, 내가 미안한데 어떡해 그럼!”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욕설은 필시 해금이 아니라 성유 그 자신을 향한 것일 테다. 그럼에도 해금은 그 즉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성유에게서 벗어나려 기를 썼다.

“놔.”

“미안해, 해금아. 내가 미안해.”

성유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양 무쇠처럼 버텼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비좁은 틈바귀에서 해금이 아무리 주먹을 휘둘러본들 효과 없었다. 결국 그녀는 빽빽 소리만 질렀다.

“놔, 놔! 놓으라고!”

“다시 네 입으로 말해주길 기다렸어, 난!”

“…….”

그 순간 해금이 움직임을 멈췄다. 시간도 같이 멈춘 듯했다. 그러나 성유의 말은 결코 끊어지지 않고 띄엄띄엄 느리게나마 이어졌다.

“정말이야. 난 계속 기다렸어.”

“…….”

“네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야. 널 가엾게 여기지 않은 것도 아니야. 네가 늘 씩씩하게 웃는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은 적도 없어.”

“…….”

“난…… 널 제대로, 떳떳하게 안아주고 싶었어. 하지만 결국 내가 자존심을 내세운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해금아.”

해금아. 성유에게 불리는 대로 귓가가 찌르르 울렸다. 고작 이름일 뿐인데 번번이 목구멍이 좁아들게 만들었다. 해금은 입술을 짓씹었다. 기어코 성유의 가슴팍을 멀리 밀어냈다. 때리고 걷어찼다. 그러다 엉엉 울었다.

“그러지 마……. 그러지 좀 마라…….”

열 살짜리 어린애처럼 목 놓아 울다가 금세 불같이 화를 냈다.

“제발 나한테 사과하지 좀 마.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좀 하지 마, 제발!”

풀썩, 바락바락 악을 쓰던 해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성유가 그랬던 것보다 한층 거친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서러운 울음소리마저 터져 나왔다. 누가 더 어린아이 같은지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면서 유치한 소리를 마구 지껄여댔다.

“너 같은 거 너무 싫어. 넌 나를 진짜로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왜 네까짓 게 내 앞에 나타나서…….”

“아냐, 나는……. 해금아, 그런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