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좋아하게 되면 꼭 말해주기!

단, 거절당할 시, 이유 불문 깨끗하게 마음을 접을 것.

비혼주의자 강여나 씨는 국내 최대 규모 종합병동 병원장의 외동딸로 산부인과 전문의다. 맞선 보라는 아버지의 압박을 쌩까며 잘 근무해왔는데, 아버지의 농간으로 응급수술에 못 들어가게 되자 그길로 독립해서 병원 개업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소화그룹 막내아들 선기림은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 스물다섯 번의 맞선 실패 끝에 맞선 리스트의 목록 외 비고에 들어 있던 ‘강여나’로부터 선 자리에서부터 바람을 맞는다.

여차저차한 상황 끝에 맞선 테이블, 아니 협상 테이블 앞에 앉게 된 두 사람.

본계약 및 특별조항까지 줄줄이 쓰여 있는 30여 페이지의 ‘맞선-결혼-이혼 플랜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2. 작가 소개

유나리

취미로는 싫어서 노력껏 열심히 씁니다.

▣ 출간작

그거 고백 아니었는데

악의에 젖다

좋아하는 드라마

욕망을 말하는 게임

황제 해시트

세 번째 상속인

목단에 붉은 이슬 맺혔네 外

3. 차례

#6. 선착순 한 명만 받습니다

#7. 기브 앤 기브, 테이크 앤 테이크

#8. 빨리빨리, 혹은 벼락치기

#9. 결국 이렇게 된 사람들

#10. 풍덩!

#11. 척추 펴세요

#에필로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걸작 ‘수련’은 총 세 개의 대형 패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는 그 거대한 그림을 생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고치고 고쳐서 미완으로 완성하였다

#외전. Drive it like stole it!

4. 미리 보기

1층, 출입카드를 찍고 나온 기림이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비서의 걱정대로 취재진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선기림 실장님!”

“논란 중인 폭행 의혹에 대해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입장표명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소화그룹과 태정의료재단 사이에 정말 커넥션이 존재하나요?”

“손에 들고 계신 쇼핑백은 뭡니까?”

“폭행당했다고 주장하는 남성과는 어떻게 알게 된 관계인가요?”

기자들은 하나같이 녹음기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섣불리 기림의 몸에 손을 대거나 함부로 앞을 가로막진 못했다. 그야 당연하다. 오하진이 아닌 선기림인걸. 강여나도 아닌 선기림이다.

대형병원 이사장 딸도 아닌 고작 병원장 딸에 불과한 강여나라면 모를까, 더욱이 고아원 출신의 미혼모 오하진이라면 모를까. 소화그룹 김 회장의 친아들로서 몇 년 전부터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기림의 면전에 대고 거친 언행이나 눈 밖에 날 질문을 서슴기란 불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림은, 사실 여나의 의견을 충분히 이해했다.

비록 이해와 동의를 같은 선상에 두지는 못하더라도 굳이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기림이 아닌 하진이었다면 분명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을 테니까.

“그 남자라면 뭐, 겨우 이름이나 들은 사이인데요. 음……. 듣긴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정문을 향해 걸어가며 기자들의 질문에 대꾸해준다. 서글서글하니 난처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서.

“이번 여름휴가 때 신규 브랜드 구상할 겸 혼자 제주도 여행을 갔었거든요. 그때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길래 일단 태워줬었어요. 위험하잖아요. 사정을 들어보니 전 재산을 도둑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딱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마침 전용기에 자리도 남아서 올라올 때 동행했었습니다. 아, 거기 기자님, 뒤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기림이 출입구 라인을 따라서 난 펜스를 가리키며 근처 기자 한 명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다정한 말씨와 섬세한 손짓에 당사자를 포함한 몇몇 기자의 얼굴엔 더럭 감동이 스쳤다. 바라보는 눈빛들이 흐리멍덩과 물렁물렁 사이를 오간다.

기림의 걸음걸이에는 시종일관 여유로움이 넘쳤다. 절대로 도망칠 이유 따위 없어 보인다.

“마음이 안 놓여서 택시비까지 챙겨드리고 공항에서 헤어지려다가, 제가 경기도 A시로 간다고 했더니 본인도 그쪽이 집이라면서 태워달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조금 꺼림칙하다고 느꼈지만 기왕 호의를 베푼 김에 제 목적지 근처에 가서 내려줬는데…….”

일순간 기림의 눈 깊은 곳엔 차마 숨기지 못한 실망과 슬픔이 배어났다. 그러나 곧 떨쳐버리고, 머쓱하게 손마디로 눈썹을 훑으며 웃었다. 다음은 다소 빠르게 덧붙인다.

“지금 언급되고 있는 여성병원에 제가 들어가는 모습을 숨어서 보고 있었는지, 갑자기 따라 들어와서는 거액의 돈을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거절하고 내보냈고요.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겠죠.”

말투에 더 이상 떠올리기 싫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어느덧 출입문이 코앞이라, 기림은 문득 부드러운 눈길로 취재진을 둘러보더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 남성이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피해자는 우리인데요. 저는 물론이고 졸지에 송사에 휘말리게 된 병원 원장님께서도 굉장히 상처받으셨어요. 곧 정정보도가 올라오겠거니 믿으며 참는 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피해자는 우리니까요.”

우리.

같은 단어가 두 번이나 강조격으로 들어갔다. 그에 의문이 제기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시 구석에 서 있던 기자가 번쩍 손을 들고 외친다.

“잠시만요, 선기림 실장님! 그날 해당 병원은 휴진일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어째서 문도 열리지 않은 병원에 찾아가신 거죠? 그것도 여성병원에요!”

그것을 시작으로 질문이 다시 꼬리를 이었다.

“혹시 그 안에서 불법적인 거래가 오갔던 건 아닌가요?”

“오늘 오전 소화그룹 본사에선 태정의료재단과의 협약 체결설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는데요, 실장님도 동의하십니까?”

“방금 전에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경찰에 신고하시지 않았죠?”

일찍이 그려둔 그림과 간절히 바라는 대답이 명확했다. 그사이 기림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가버릴 기세로 출입문 앞에 서자, 초각해진 취재진은 기림 대신에 출입구 보안요원을 밀쳐 그의 동선을 막으려 했다. 그래봤자 몸싸움에서 밀릴 보안요원이 아니었으므로 실패한 시도에 그쳤다.

여지없이 회전문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림은 바로 나서지 않고 잠시 멈춰 있었다. 멀뚱히 고개를 숙였다가, 또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휙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렇게.

“그게……, 그땐 아직 부모님 몰래 만날 때라서……. 으으음…….”

별안간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빠르게 말려들어갔다. 움켜쥔 주먹을 어색하게 아래로 내리더니,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부연한다.

“그 여자가 이 여자예요.”

그 여자.

그러니까 그 여자가 이 여자라고.

다행히 이 자리에 기림의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이해력이 부족한 이는 없었다. 다만 너무 놀라서 말을 잊었을 뿐.

“신분 공개되면 병원 운영에 차질이 생길까 봐 결혼 전까진 되도록 숨기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기자님들께서 고의로 그러신 건 아닐 테니까요. 어차피 날짜도 잡힐 예정이고…….”

“…….”

그러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침묵이 공간을 잠식했다. 고요하다. 내내 몰아치던 기자들의 질문이 뚝 끊겨버린 탓이다. 그들의 사고회로와 함께. 그토록 갑작스레 찾아온 이질적인 침묵에도 기림은 당황하지 않았다. 가볍게 묵례하고 그제야 회전문에 들어선다. 꾸벅, 하는 고갯짓이 세상 예의 발랐다.

“그럼 이만.”

아니, 선샤인했다.

눈이 부실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하여 전원 일시정지했던 취재진의 사고회로는 몇 초 뒤, 사뿐한 백스텝으로 회전문에서 되돌아 나온 기림을 목격한 순간부터 재개되었다. 시작은 짧게 달싹이는 그의 입술이다.

“아 참.”

빼꼼, 그가 턱을 당기며 비스듬히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혹시 청첩장 필요하신 분, 계십니까?”

마치 취재진의 머릿수를 헤아리는 듯한 그 기다란 손가락이란, 보는 이로 하여금 선착순에 들지 못하면 국물도 없으리란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리에 있던 모두는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 높이 팔을 치켜들고 우렁찬 고성을 내질렀다.

“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