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대는 나의 것, 나는 그대의 것.”

임금의 입맛을 돌게 할 간장을 구하라! 일곱 번째 왕자 이칠해는 아바마마의 명을 받들어 간장을 구하러 길을 떠나고, 영의정의 아들 이등산 역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간장 레이스에 동참한다. 시작부터 자꾸만 마주치는 칠해와 등산, 등산은 순진한 칠해를 놀려먹기 바쁘고 칠해는 그런 등산이 싫지 않은데! 점점 더 어려워지는 여정에서 칠해와 등산은 동행하기로 결정하고, 그 길에서 등산도 칠해도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게 된다. 치열한 간장 레이스, 그 끝에서 두 사람이 마주할 진실은 무엇일까?

“무서워 쩔쩔매는 것은 여전하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러면 지금이 덜 무섭지 않소? 적어도 나는 살아는 있으니.”

“…….”

“어때요, 대감?”

칠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혀에다 꿀을 발랐나. 과거시험이 구술이었다면 저이는 장원급제다. 칠해는 그렇게 생각한다.

“……날…… 설득하려 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그 결정이란 거 좀 미루시오. 아직 우린 청춘이오.”

2. 작가 소개

예요

http://blog.naver.com/merubi

▣ 출간작

변장 도령

환장 도령

송장 도령

천일야화 박하나 편

천일야화 이두나 편

임금님은 흡!

왕의 노리개

3. 차례

#1. 간장을 구하러

#2. 수상한 부마

#3. 하지 말아야 할 짓

#4. 소 두 마리, 돼지 새끼 밴 암컷 그리고 다람쥐

#5. 그물에 매달린 엉덩이

#6. 다람쥐가 덕영일 확률

#7. 첫사랑

#8. 공주를 잊은 부마

#9. 재회

#10. 비단 탁자보

#11. 국상

#12. 새로운 세자

#13. 독이 든 알밤

#14. 칠해 곁에서

#15. 반가운 이

#16. 그대는 나의 것, 나는 그대의 것

#외전

4. 미리 보기

드륵, 그가 경근당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불쑥, 칠해가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진 바구니를 쳐다봤다. 무명천을 열어 보여주는 거기에 잘 익은 홍시가 가득했다.

“과수원집 아들.”

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누가 좋게 보지도 않는데 그는 연신 웃고 있었다. 저 허세. 칠해는 쓰던 붓이나 놀렸다. 그가 홍시에 관심을 두지 않자 등산이 시무룩해진다.

“녹용을 가져올걸…….”

그는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칠해는 쓰던 족보나 계속 써내려갔다.

“이보시오, 대감.”

“왜요, 서리.”

“우리 사이 벽이 너무 높소.”

“아쉬우면 과거를 치시든가.”

“그래도 그쪽을 초월할 순 없지. 벌써 대감이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40년이 걸리셨는데 말이오.”

“사람 놀리지 마시오.”

“알았소, 대감.”

“더 할 말이 없으시거든 이만 나가 보시오. 난 일해야 하오.”

별 중요치도 않은 일을 한다고 저리 유세다. 족보 베껴 쓰는 거야 언제 해도 될 일. 하루쯤은 쉴 만한데 틈을 안 준다. 등산은 손을 꼬물대며 붓을 끼적거리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다람쥐 대감.”

“…….”

엉뚱한 호칭에 칠해가 고개를 쓱 든다. 그는 진짜 다람쥐처럼 순수해졌다. 맑은 얼굴을 기웃.

“뭐라고요?”

“다람쥐 대감. 내가 준 다람쥐 어쨌소? 버렸소?”

“…….”

저는 왕족이다. 종친이다. 왕자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칠해는 붓에서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등산을 건너봤다. 저 사람이 계속 문을 두드린다. 문이 부서질까 두렵다.

“그건…….”

“어, 먹물!”

그가 외쳤다. 공들여 적어가던 종이가 엉망이 됐다. 칠해는 허망한 얼굴로 종이를 살펴본다.

“하…….”

붓을 벼루에 내려두고 종이를 빼냈다. 버려야지. 할 수 없다.

“날이 좋은데 산책을 좀 갑시다. 갑갑하지 않소? 하루 종일 방 안에서만.”

“……산책 싫소. 족보 만들어야 하오. 이번 달에만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별로 없다. 이상하게 이번에는 후손들이 덜 태어났다. 평소보다. 분발하셔야지요.

“많아서요.”

“거절이요?”

“뭐, 그렇다고.”

“나를 뻥 찬 것이오?”

“차다니?”

“내가 싫소?”

“……싫다니.”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니지만…….

“요 앞 은행나무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하며 그는 물러났다. “대감이 올 때까지.” 하는데 너무 비장했다. 칠해는 한동안 손을 놓고 멍하니 있었다. 없는 생각 몇 개를 정리해본다. 그래 봤자 고민할 거리도 아니다. 그냥 나가서 걸으면 돼. 한쪽에서는 그리 시켰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무슨 짓이야? 농장이랑 과수원이 그리 탐나?’

그러고 있었다. 그깟 물욕에 자신을 팔지 말자, 그랬다. 그렇지만 칠해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이 알아서 정돈을 시작했다. 갓을 매만지고 도포를 바로 하고 허리끈을 보기 좋게 묶었다.

“안 돼.”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혼자 중얼거린다. 그렇지만 자신도 보았다. 자꾸만 꿈틀거리는 거울 속 입꼬리. 칠해는 마지막으로 애써 무서운 표정을 연습해본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시무룩하게, 별 의미 없이 짜증나게.

‘원치 않아, 원치 않아!’

발걸음도 바쁘게 그는 문을 나섰다.

‘원치 않지 않아!’

에라, 모르겠다. 걸음을 서둘렀다. 말 그대로 요 앞. 경근당 정문만 나서면 되는 거기에 등산의 넓은 등이 보였다. 그 어깨 한쪽에 장난처럼 은행잎 하나가 걸쳐져 있다.

“어이!”

“…….”

그가 밝게 이쪽을 돌아보는 바람에 덩실, 어깨 절벽에서 몸을 던진 노란 은행잎. 그게 떨어졌다. 갈지자로 퍼러럭, 퍼럭럭. 잎이 땅에 닿기도 전에 칠해가 등산의 옆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의 앞에 나란히 마주 섰다. 연습했던 꿍한 얼굴은 다 까먹었다. 그냥 미소만, 좋은 미소만 머금고 그를 향해 섰다.

“가실까요?”

등산이 넉살 좋게 물었다. 당연히 가야 할 길 쪽으로 손까지 펼쳐 보이며 안내하는 시늉을 한다. 그게 우습다. 뭔 양반집 아기씨 대하듯 하는 그 넉살이.

으흐흐흐, 웃으며 칠해는 발을 옮긴다. 나란히 걷는 가을 길이다. 햇살은 투명하게 쏟아졌다. 둘의 도포가 닿을락 말락. 그런 거리를 두고 둘은 발을 맞춰 걷는다.

“사슴 농장이 난리요. 발정이 나서 볼 만하오. 언제 한번 가시겠소?”

“됐소.”

새초롬하게 거절이다. 친구들은 계를 모아 구경을 온다. 돈 주고도 보는데, 공짜 초대를 마다한다. 그것이 얼마나 진귀한 구경거린 줄도 모르고. 쯧쯧, 역시나 너무 곱게 컸다. 왕자라서 그렇다. 막 진흙탕에도 굴러보고 그래야 하는 것을.

“이번에 방앗간도 인수했소. 달밤에 한번 오시겠소?”

“…….”

발을 우뚝, 걷다가 멈춰 서서 칠해가 등산을 빤히 본다. 키가 작은 쪽이 그쪽이니 등산이 내려다봤다.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임대업.”

“?”

뭘 임대하느냐는 눈빛이다. 등산은 부연설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히 친절한 설명을 시작한다.

“젊은 남녀들이 밤에 애용하지. 특히 달이 이만큼 커진 보름에. 그때가 절정이오.”

“미쳤소?”

“으음, 미치지 않았소. 그쪽이 좀 다른 것뿐. 아무튼 오시려면 오시오. 내 대감한테는 반값.”

“안 가오. 갈 일 없소!”

“단정하지 마시오. 사람 일은 단정 못 하오.”

“…….”

“세상에는 참 비밀이 많소.”

어느 집 양반 아기씨랑 종놈이랑, 과부 누구랑 총각이랑, 사랑은 늘 시작되고 있다.

“겨울에는 방아 찧을 일이 없으니 임대업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오. 옆으로 창고도 몇 개 더 만들고. 방음도 신경 쓰고.”

착한 부마 친구는 방앗간과 정자를 다시 내놓으라,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등산을 경근당에 꽂아주는 대신 용돈이나 좀 받아 챙기셨다. 어차피 간장을 구해온 공은 어마어마하게 크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등산이 덕영군을 구워삶으면 나중에 줄이나 좀 대자 하고 셈을 마쳤다. 역시 바른 벗이다. 등산은 그날 부마의 집에 찾아가 부탁하기를 잘하였다, 생각했다. 아무렴, 백번은 잘한 일이지!

“부자 되시겠소.”

“돈 좋아하오?”

“왕자가 돈을 밝히면 쓰겠소?”

“알았소. 티 안 나게 쓰게 해주지.”

“…….”

“나는 열심히 벌 테니 행복하게 사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버럭, 화를 냈다. 칠해는 다다다, 앞을 보며 걸었다. 뱅뱅. 알아들을 수 없게 뱅뱅. 돌려서만 이야기한다. 답답하다. 그러니 감을 못 잡겠다. 칠해는 돌멩이에 걸려 콰당, 넘어졌다. 그 앞으로 등산이 옮겨와 선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칠해를 구경한다.

“지금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오?”

“…….”

아, 서럽다. 부끄러워 일어날 수가 없다. 손이라도 잡아주지 않고 뭐 해! 칠해는 장난만 치는 그가 짜증났다.

“나 심장이 터질 것 같소.”

“으…….”

부끄러워 얼굴이 터지려는 건 이쪽이다. 뻘게진 얼굴로 칠해가 땅을 짚고 있는 자기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린다. 무릎에 돌멩이가 박혀 아프다.

“귀엽소. 넘어지는 것도.”

“으아아악!”

그대로 벌떡, 등산을 무시하고 벌떡. 그다음에는 흙 묻은 손을 탈탈 털고 아무 일 없듯 씩씩하게 걸었다. 그런 칠해 뒤에 등산이 꼼짝없이 서 있다. 시선은 멀어지는 다람쥐. 벌떡벌떡 일어나 잘도 걷는 다람쥐.

“돌아오시오! 돌아와!”

부질없이 불러본다. 그래도 등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발정 난 사슴을 꼭 보여주고 싶다. 가끔은 수컷끼리도 뭉친다. 어떤 때는 그게 더 격렬하다.

“다람쥐…….”

꼭 잡아서 손에 넣고 키울 테다. 등산은 칠해가 멀어지는 쪽으로 내달렸다. 도포를 펄럭이며 훌쩍, 그가 큰 키로 뛰어온다.

뒤를 흘끔 돌아보고 칠해도 속력을 내었다. 그에게 잡히고 싶지 않다. 아니, 아까처럼 같이 나란히 걷고도 싶다. 아니, 안 해. 아니, 해. 그렇게 마음이 복잡하다. 하지만 일단은 저를 잡아먹을 듯 뛰어오니 반사적으로 내달린다. 도망친다. 다다다다, 갓끈이 휘날려라 달음질치다 중간에 잡혔다. 등산은 확 움츠러든 칠해의 목을 붙들고 껄껄 웃었다. 칠해는 썩은 도토리 먹은 다람쥐처럼 인상을 팍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