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져요.”
미스 김이었던가? 그녀의 호들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석의 매서운 눈초리가 미스 김에게로 날아갔다. 붉어진 얼굴의 미스 김은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직원들의 감탄 어린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지고 연주자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결과는 언제 알려 주시나요?”
“아,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 오늘 와주신 분들은 1차엔 합격하신 거니까 최종 결정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연락은 없을 겁니다. 탈락입니다.”

연주가 끝난 뒤 많은 소리들 중 그의 목소리는 없었다. 소국은 정확하게 주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어머…… 무슨 일이지?”

직원들의 믿을 수 없어 하는 말들이 들려오고 그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당사자인 소국은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쪽은 기본 etiquette도 없나? 아니면 당신 연주 스타일인가? 실내에선 그것 좀 벗지, 그래?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 능력이 좋다 한들 그건 허울 좋은 눈속임에 불과해. 음악을 한다고? 음악이란 사람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이 기본 예의도 모르면서 좋은 연주임네 한다? 후후, 웃기는군.”
“티, 팀장님, 저 실은…… 저분은…….”

윤 대리가 중재에 나서려나 보다. 하지만 주석은 자신의 원칙은 어떤 상대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었다. 주석의 손이 거침없이 올라가더니 윤 대리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확실한 해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윤 대리가 주석의 곁으로 다가가 다시 말문을 열려 했다.

“팀장님, 한소국 씨는…….”

주석의 매서운 시선이 윤 대리에게 향하자 그나마 용기를 내 입을 열었던 윤 대리는 얼굴까지 상기되어 주춤거리며 물러나 버렸다.

“그쪽은 결과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이만 접지. 모두들 퇴근해요.”

주석은 앞에 놓인 서류를 정리해 손에 들고는 일어섰다. 돌아서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여자의 음성이었다.

“한소국입니다. 그쪽이 아니라. 사람은 이름으로 부르셔야죠.”

주석이 돌아서서 소국을 바라보았다. 주석은 작은 동요도 없이 자신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는 보라색 유리알을 응시했다. 그의 이러한 차가운 시선 앞에 놓이고도 그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놀랍다고 해야 하나? 주석은 불쾌감 따위 조금 뒤로하고 약간의 호기심으로 소국을 향했다. 주석은 자신의 따가운 질책에도 선글라스를 벗을 생각조차 없는지 당돌하게 마주하고 선 이 여자를 다신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구차하게 변명이나 애걸 따위는 취미 없는데 어쩐다?”

조롱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도 여자는 그 고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쪽도 예의 없기는 싸가지가 울고 가겠네요. 팀장이라 했나요? 사람 다루는 솜씨로 보니 그 자리 오래 꿰차고 있으려면 돈 꽤나 밀어대야 될 것 같은데…….”

소국이 앉은 자리에서 몸을 숙여 바닥에 내려 두었던 무지개색 손뜨개 가방을 들었다. 장미가 솜씨 자랑하며 몇날 며칠에 걸려 만든 작품이었다. 여자는 색을 알아야 한다던가? 그리고 소국에겐 화려한 색이 어울린다고 가지가지 색의 실을 엮어 만들어 준 가방이었다. 비로 젖어 버려 후줄근하게 처져 버린 가방은 소국의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무거워져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소국은 좀처럼 움직여질 것 같지 않은 발을 들어 조심스레 걸음을 떼어 놓았다.

“도와 드릴까요?”

소국이 윤 대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얼굴을 돌려 웃어 보이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내보내! 아가씨, 이쪽에선 일하기 힘들 것 같군.”
“후후, 일하고 안 하고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는 것 아닌가요? 제 곡에 대한 평가라면 얼마든지요. 하지만 그 외에 저 개인에 대한 평이라면 그쪽에게선 듣고 싶지 않네요. 그쪽이 말한 결과…… 제 곡에 대한 평가인가요? 그럴 만한 실력, 있으세요?”

주석은 소국의 차분한 목소리에서 그가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충분한 조롱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올라간 입꼬리로 보아 그녀의 감춰진 두 눈은 그를 한껏 비웃고 있음 또한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국의 두 눈을 본다면 그곳에 담긴 것이 조롱이나 비웃음 따위가 아닌 고통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소국이 자신의 등 뒤로 피아노를 고갯짓해 보였다.

“저 귀여운 덩어리가 피아노란 것 정도는 아시나 모르겠네요.”

소국은 피아노로 왔던 길을 되짚어 보며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문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발, 저 인간 앞에서 넘어지지만 말자. 천천히…… 그래, 이런 수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나가자, 소국아.’

주석은 당당하면서 절제된 걸음으로 문을 향해,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소국을 바라보며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비웃음을 당해 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부하 직원들 앞에서의 수모라니…… 이 돼먹지도 않은 조그만 여자 따위가!

“뒷일 생각도 않고 혀 놀리는 것 보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군.”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은 그의 말은 결연하게 마음먹고 내딛었던 소국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직원들의 놀람과 비난이 뒤섞인 신음을 회의실 안으로 퍼져 가게 했다.

“팀장님!”

윤 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 윤 대리에게 자신은 괜찮다며 안심시키듯 소국의 손이 올라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후후후, 대단하신 분임에는 틀림없네요. 딩동댕! 정답이에요. 상품으로 뭘 드릴까요?”

소국은 정확하게 주석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어가 그의 체취를 느낄 만큼 주석에게 다가가 섰다. 조금 전 하얀 건반 위를 날아오르던 그녀의 길고 여린 손가락이 자신의 보라색 선글라스를 벗었다. 주석의 얼굴 밑으로 다가간 소국은 그가 자신의 솜털까지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어 올렸다. 깊은 우물인가? 아님 반짝거리는 흑요석인가? 하지만 그 아름다운 투명체는 형체를 담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 흔들리고 있었다.

“저 눈에 뵈는 것 없어요.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제 주제를 일깨워 주셔서. 이만 실례할게요. 아, 탈락 연락은 안 해주셔도 되요. 이미 결과는 알고 가니까요. 선물이에요. 이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소국의 손에 들렸던 선글라스가 허공으로 던져지더니 주석의 얼굴로 날아들어 부딪혀 왔다.

“도와주시겠어요?”

목차

프롤로그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소국이와 주석이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