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하늘과 바다가 함께 머무는 몰로카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따라 종이에 설렘을 채웠다.

그런 로하를 현실로 이끈 건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꿈같은 그림이네요.”

원치 않는 그림을 그릴 때 선이 엉망진창이 되듯,

로하의 머릿속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서진은 미소 지었다.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뜻이죠, 날 살게 하는 작가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불편해요.”

“왜요? 내가 당신의 비밀을 알아서요?”

‘비밀’이란 단어의 무게를 아마도 서진은 모를 것이다.

제 그림이 난도질당해도 입도 벙긋할 수 없는 자신.

“그게 당신의 전부가 아닌 거 알아요.”

길을 잃은 그녀에게 그가 비로소 세상을 열어 주었다.

“진짜 로하 씨를 보여 줄 때까지 내 옆에 가둬 두려고요.”

<작가 소개>

이예담

李汭潭

2월 7일, 겨울에 태어난 물병자리.

좋아하는 게 많고, 하고 싶은 건 더 많은 언제나 청춘.

소심하지 않은 듯 소심한 A형.

2017년엔 더 많이 쓰고 싶은 글쟁이.

Sunny Ju.

키워드 : #현대물 #잔잔물 #오해물 #직진남 #능력녀 #성장물 #이야기 중심

<본문>

Departure. 바다와 하늘이 만난 곳

로하는 한동안 숨이 멎은 듯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걸린 어떤 그림들보다도 아름다운 명작이었다. 비로소 로하는 자신이 한국을 떠나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바로 그 하와이였다.

하와이 제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섬, 몰로카이의 한 바닷가를 아무 말 없이 거닐었다. 어떤 수식어도 의미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적어도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코코넛 나무들이 하늘 높이 닿는 곳에 차를 멈춰 세운 건 우연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래 수없이 봐 왔던 코코넛 나무들. 그러나 나무들이 울울창창한 곳은 처음이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진짜 하와이를 볼 수 있는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길가에 차를 아무렇게나 세운 뒤 후다닥 뛰어내렸다.

그녀의 손에는 고작 작은 연습장과 연필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설레는 심장이 더욱 쿵쾅거릴 공간만 찾으면 됐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코코넛 열매를 피해 걸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걸을 때마다 귓가에 심장 소리가 울렸다.

정작 눈앞에 해변이 펼쳐지자 로하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차마 스케치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입을 크게 벌린 채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볼 뿐.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하늘은 인간의 물감으론 담아낼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갯벌엔 얕게 바닷물이 깔려 있었는데, 지금껏 본 갯벌 중에서도 가장 투명했다. 차마 그 질감을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신비로웠다.

로하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맴돌 듯 걷고 또 걸었다. 아무도 없는 갯벌에 자신의 발자국을 가득 찍어 나갔다. 마치 물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몽롱함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어 갯벌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옷에 진흙이 묻는 것쯤은 전혀 상관없었다.

“알로하 하와이! 나는 서로하야. 잘 부탁해!”

두근거리는 심장을 따르기로 했다. 갯벌 진흙이 묻어 조금은 더러워진 연습장에 연필로 쓱쓱 자신의 설렘을 채워 갔다. 몇 시간이고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면 무엇이든 그리고 싶었다. 이 풍경을 보고도 펜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작가가 아니리라.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쓱싹쓱싹 스케치만 해 나갔다. 바다, 갯벌, 서로하, 그리고 꿈. 그것이면 충분했다. 터질 듯한 벅찬 기대감이 그녀를 부풀게 했다.

『Moe’uhane.』

그녀를 현실로 불러들인 건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분명 하늘과 바다, 종이와 연필, 그리고 자신밖에 없었는데…….

로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곳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양인 남자가 서 있었다.

로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찬찬히 그를 살폈다. 한국어는 당연히 아니었으며, 영어도 아니었다. 어감상 하와이 말인 것 같은데 로하는 당연하게도 하와이 말을 거의 알지 못했다. 고작 가이드북에서 봐 둔 몇 단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녀의 눈빛에 가득 담긴 물음표를 읽은 걸까.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꿈.”

“……네?”

“하와이 말로 꿈이란 뜻입니다.”

남자의 미소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남자는 분명 한국어를 했다. 그것도 아주 유창하게.

“꿈같은 그림이어서요. 덧붙이자면 이 상황도 제게는 꿈꾸는 것 같고요.”

“네, 참 멋진 곳인 것 같아요. 우연히 온 곳인데…….”

와이키키 해변에서 로하의 귀에 영어 다음으로 많이 들렸던 언어가 한국어였다. 다른 나라 언어들을 못 알아들은 탓일 수도 있었지만, 분명한 건 한국인이 그만큼 하와이를 많이 찾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 우연히 오셨다고요?”

“네. 그냥 차를 타고 가다가 보이기에…….”

“나름대로 몰로카이 섬에선 유명한 곳이라고 하던데요. 코코넛 그로브라고.”

그러나 몰로카이 섬은 아니었다. 검색을 해도 거의 정보가 나오지 않는 낯설고 작은 섬. 이곳에서 한국인, 그것도 갯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와이셔츠에다가 정장 바지를 갖춰 입은 말끔하게 생긴 남자를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로하는 잠시 생각한 끝에 그를 경계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표현대로 현실과 환상의 그 어디쯤 되는 듯한 이 꿈 같은 공간에서는 누군가에 대한 의심이나 경계를 품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하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우연히 만난 이 풍경도, 연습장 위를 날아다니던 자신의 연필도,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인 이 남자도.

어느덧 하늘엔 불그스름한 노을과 어슴푸레 찾아오는 황혼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로하의 마음 또한 그러했다. 설렘과 낯섦, 그 사이에서 로하는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의 그림에 집중할 뿐이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Nou No Ka Iini.』

“네?”

“여기 말로 제가 당신을 원한다는 뜻이죠.”

“아니, 그게…….”

로하는 연필을 떨어뜨렸다. 갯벌 위에 연필이 푹 꽂혔다. 마치 화살처럼.

01. 그곳, 하와이

어느 평일의 한가로운 오후, 로하는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유리창을 통해 따사로이 들어오는 햇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기분 좋은 커피 향, 하얀 스케치 노트와 연필 한 자루. 로하가 자신과 그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기요!”

사각사각, 손끝에서 나오는 연필 소리에 한창 취해 있던 중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로하는 고개를 들어야 했다.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올 시간.

“아, 죄송합니다.”

딱 봐도 두 번 이상은 자신을 불렀을 법한 손님의 표정에 로하는 스케치 노트를 구석으로 밀어 버렸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 로하는 이 상황이 퍽 익숙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하는 한 카페의 아르바이트 생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커피를 내려 기분 좋은 향이 솔솔 나는 컵을 손님에게 내밀었다. 꾸벅, 인사를 덧붙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일 이 시간은 손님이 많지 않은 데다 자신의 영감을 그림으로 옮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어 두었던 노트로 향했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 네. 조금.”

이상한 손님이다. 주문한 음료를 받아서 그냥 가는 대개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과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하는 그를 힐끗 본 뒤 대강 대답하고 다시 연필을 쥐었다. 마지막에 그려진 선이 영 마음에 안 들어 입술을 삐죽이면서.

“취미예요, 전공이에요?”

“……둘 다요.”

“아, 그래서 여기서 일하시는 건가.”

‘여기’라는 단어에 로하의 눈썹이 살짝 씰룩였다. 그러나 부정할 말이 없었다. 로하가 일하는 카페는 아주 작은 규모였다. 사실 시급만 따지면 여기서 일하는 건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한 푼이 급하고 귀한 로하로서는 더더욱. 그러나 로하는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이곳을 택했다. 카페가 이안 갤러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 갤러리는 청담동에 위치한 그리 크지는 않은 규모의 갤러리로 로하는 이곳을 무척 좋아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흥하는 거물급 작가들은 전부 이안 갤러리와 손을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로하가 이곳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다른 갤러리들과 달리 신인 예술가 발굴에도 꽤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안 갤러리와 손잡고 한 명의 작가로서 당당히 일하게 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그녀는 매일 카페로 출퇴근을 하곤 했다. 그녀가 일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스케치하는 이유기도 했다.

“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로하는 속으로 그를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손님은 왕이다’라는 철저한 자본주의 정신 아래 형식적인 대답을 건넸다. 그런 로하와는 정반대로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신기하네요.”

“뭐가요?”

아무래도 집중이 되지 않아 로하는 결국 연필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 닿았다.

“아뇨, 선이요.”

“저기…….”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긴 쑥스럽지만 제가 그림을 좀 볼 줄 알아서요.”

“아, 네.”

이안 갤러리에 드나드는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 아마도 아트 딜러나 예술 평론가, 그도 아니라면 이쪽 분야에서 일하는 기자 정도 되지 않을까. 물론 재벌가 회장님들의 취미 생활에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한 비서들도 있겠지만.

로하는 그의 말이 새삼 놀랍지도 않아서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관심이 없으니 그만 날 내버려 두고 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쪽 그림 선이 누굴 생각나게 하네요.”

“네?”

“취미라면 이해가 가는데 전공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남의 화풍을 모방하지 않으니…….”

그림 그리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는 분명 이 계통 관계자가 맞았다. 현대 미술계에서 ‘화가’라는 단어가 잘 쓰이지 않는 것을 아는 사람. 그렇기에 로하는 그가 하는 말이 더욱 거슬렸다. 비록 듣는 자신이 아직 제대로 데뷔조차 못 한 ‘그림쟁이’라고 해도,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 무엇인지 이쪽 관계자가 모를 리 없었다.

“이보세요, 대체 제 그림 선이 누구랑 아니, 그렇게 잠깐 보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안환희.”

“……네?”

“안환희 화백을 닮았어요, 당신 선.”

“아…….”

로하는 보이지 않게끔 안쪽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닮지 않았지만, 닮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선. 그 비밀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꺼낼 순 없었다. 아니, 상대가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무덤까지 지키고 가야 할 비밀이자 제 치부이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실례인 줄은 아는데…….”

“제 교수님이시니까요. 괜, 괜찮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을 간신히 내뱉은 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 미묘한 변화에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로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그의 행동을 내버려 두던 로하는 그 남자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야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건 돈이었다. 천 원짜리 지폐 네 장. 그중 한 장은 완전히 꼬깃꼬깃 구겨져 있었다.

그제야 로하는 그에게 커피값을 받지도 않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급에서 까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대신 로하의 마음속엔 억울함과 외로움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던 그림이 손끝에서 구겨졌다. 그 남자가 쥐여 주고 간 네 장의 지폐보다 더.

아주 간절히 선을 찾고 싶었다. 자신만의 선을.

선에 대한 열망이 진해서였을까. 남자에 대한 기억은 금세 희미해졌다.

그건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과 관련된 수많은 기억으로 충분히 꽉 차 있었기에 그녀에 대한 기억은 지워도 될 무언가였다.

***

로하가 하와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건 오로지 자신의 선을 찾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그녀가 하와이에서 그려야 할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지만 이번 연작만 잘 끝내면 이번에야말로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맨 작가 서로하만의 온전한 선을.

그렇게 닷새 전,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손이 움직이질 않아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초록 빛깔 야자수, 새하얀 모래사장, 푸르른 바닷물. 자신이 생각하던 하와이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이상하게도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갔던 부산의 바닷가나 그보다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 갔던 강릉의 바닷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첫 해외여행이니만큼 잔뜩 들고 온 가이드북. 그 책들마다 1순위로 꼽는 곳이 와이키키 해변이었지만 그곳에서 로하는 실망을 넘어 절망을 맛보아야 했다. 지나치게 정비되어 인공적이기 그지없는 느낌의 바닷가, 수많은 상인들과 최고급 리조트들, 그리고 알록달록 제각기 멋을 뽐내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까지.

화려했다. 그러나 심장이 뛰지는 않았다.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 어떻게든 빨리 연작을 완성하고 돌아가야 했지만, 이러다간 연작은커녕 한 작품의 스케치조차 못 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적어도 이곳은 절대로 그림 속에 담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로하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모든 미술용품들을 챙겨 들고, 자신이 머물던 최고급 리조트에서 망설임 없이 체크아웃했다.

「하와이, 그러니까 진짜 하와이다운 하와이를 느끼고 싶어요. 그런 곳은 없나요?」

왜 예정보다 일찍 체크아웃하냐는 리조트 직원의 물음에 로하는 자신이 아는 영어를 총동원했다.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가이드북들은 캐리어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직원은 그녀의 말에 살짝 웃었다.

『Ae!』

하와이에서 나고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한 직원이 던진 짧지만 어색한 한 단어. 하와이 말로 예스였다. 자신에 가득 찬 직원의 밝은 목소리에 로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Molokai.』

몰로카이, 하와이 제도에서 다섯 번째로 큰 한국인들은 대개 가지 않는다는 낯선 섬. 현지 주민들의 반대로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리조트다운 리조트도 하나밖에 없다는 작은 섬이었다. 느린 하와이의 인터넷을 이용해 간신히 찾은 몇 안 되는 정보들을 보면서 왠지 그곳에선 진짜 하와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젖어 들었다.

그런데 만약 그곳에서도 심장이 뛰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설득 아닌 설득과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협박까지 덧붙인 안환희 교수를 떠올리며 로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찾아야만 했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할 공간을, 그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을. 그래야만 자신의 오랜 꿈도 조금은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그게 흙수저인 자신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Aloha!』

직원이 떠나려는 로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꼭 닮은 하와이식 ‘안녕’이었다. 똑같이 화답해 주고 싶었지만, 쑥스러워 입 밖으로 단어가 나오질 않아 결국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짜 하와이를 찾으면 자신 또한 반드시 인사해 주리라고.

무작정 호놀룰루 공항에 가 비행기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고 프로펠러 소리마저 요란한 비행기를 탔다. 떠나온 지 30분 만에 도착한 몰로카이 섬은 공항부터가 호놀룰루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짐 나오는 벨트도 없는 공항이라니.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로하는 왠지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짐을 하나하나 날라 주던 사람에게 꽤나 큰 팁을 건넨 것도 로하를 감싸는 알 수 없는 설렘 때문이었다. 최대한 저렴하게 렌트한 차에 자신이 가지고 온 미술 용품들을 간신히 실은 로하는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는 없었다. 발이 닿는 대로 아니, 바퀴가 닿는 대로 굴러다녀 볼 생각이었다.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코코넛 나무들이 하늘 높이 닿는 곳에 차를 멈춰 세운 건 우연이었다. 그곳이 바로 몰로카이 섬의 코코넛 그로브였다. 로하는 그곳에서 꿈에 취해 있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니, 그가 나타난 뒤에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그가 조금 전에 던진 말 한마디는 로하에게 당혹스러움을 넘어 황당한 것이었다.

/『Nou No Ka Iini.』 (기울기)/

자신을 원한다는 헛소리를 내뱉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멈춰 있던 순간 그 남자가 떨어진 연필을 주운 뒤 자신에게 내밀었다. 쓱쓱, 이 공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각 잡힌 하얀 와이셔츠 위로 연필에 잔뜩 묻은 진흙까지 닦아서.

그러나 로하는 차마 그 연필을 받지 못했다.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작일까. 눈앞에 보이는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는 성인 남자의 속셈이라면 뻔했다. 로하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 자신에게 고백했던 전 남자 친구를 떠올렸다. 그때 그 녀석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도 안 되는 멘트를 날렸던 것 같다. 그도 아니면 ‘원한다’는 단어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걸까.

찰나의 순간 동안 로하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원하지 않는 그림을 그릴 때 선이 그러하듯 로하의 뇌도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남자가 다시 한 번 생긋 미소 지었다. 로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쿵쾅거렸기 때문이었다. 이 쿵쾅거림은 무얼 의미할까. 낯선 남자의 미소에 대한 경계심? 아니면 이 공간에 취한 설렘? 그도 아니면…….

“쭉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의 작품을 찾아 헤맸거든요. 그 작품의 주인이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지만요.”

그림에 대한 칭찬. 로하는 좀 전에 그가 자신의 그림을 보고 꿈이란 단어를 썼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의 그림을 ‘작품’이라 불러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로하의 심장이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상황 파악 못 하는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그녀는 태연한 척 그를 불렀다.

“저기요.”

“제 눈은 못 속입니다. 본의 아니게 신작의 스케치를 먼저 훔쳐봐 죄송하지만, 솔직히 저는 기쁘네요.”

“이보세요.”

“이런 걸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저기요, 대체 지금 무슨…….”

로하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아주 오랫동안 갯벌에 앉아 있었던 탓일까.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몸이 순간 기우뚱했고, 그녀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져 버렸다.

아, 차라리 저 태양이 확 져 버렸으면 좋겠다.

로하는 부끄러움으로 빨개진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이미 양손엔 진흙이 잔뜩 묻은 상태였다.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연필을 쥐고 있는 손이 아닌 반대쪽 손을. 그의 입가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키득거리는 조소가 아니라 여전히 생글생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로하는 마지못해 진흙이 잔뜩 묻은 손을 내밀었다.

“제니퍼 안, 저는 당신을 만나려고 하와이까지 왔습니다.”

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도, 마음도 흔들렸다.

“소개가 늦었네요. 하서진입니다.”

서진이 진흙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을 꽉 잡고 그녀를 일으켰을 때, 로하의 표정은 완벽하게 진흙빛으로 굳어 있었다. 그러나 인공조명이 없는 해변엔 어느새 짙푸른 어둠만 남아 서진은 로하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친절하게 그녀의 다른 손에 연필을 쥐여 줄 뿐.

우연 혹은 운명의 장난같이 두 사람은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그곳, 몰로카이 섬의 코코넛 그로브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Aloha!』

그가 밝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진에게 로하는 알로하였다.

『……Aloha.』

그녀 또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늘색만큼이나 암울한 목소리로 멋쩍은 웃음을 뱉으면서. 로하에게 서진 또한 알로하였다.

물론 두 사람이 생각하는 ‘알로하’는 정반대의 의미였지만.

***

“왜 자꾸…….”

로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다. 학창 시절에 성적표를 숨겼을 때보다도 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선을 애써 호텔 데스크로 돌렸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몰로카이의 조용함에 푹 빠져 있었건만 이제는 직원이 나와 보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서진이 자신의 그림을 작품이나 꿈이라 부르며 칭찬해 줄 때만 해도 분명 설레었었는데, 이제 와서 이토록 피하고 싶은 걸 보면. 차라리 완전히 양심을 외면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이건 못 할 짓이었다. 안 교수가 했던 ‘마지막’이란 말을 상기하며 로하는 데스크 위의 애꿎은 벨만 눌러 댔다.

“제가 당신을 찾아다닌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따라온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몰로카이 섬은 리조트가 여기 하나뿐인걸요. 이건 정말 우연이에요.”

서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로하에게 성큼 다가섰다.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제니퍼 안. 서진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말짱 도루묵을 만들 수는 없었다.

한 달 전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작가이자 국내 모든 갤러리이 눈에 불을 켜고 계약하기 위해 찾아 헤맨다던 그녀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안환희 화백의 외동딸이란 사실뿐이었다. 미술계의 금수저 중 금수저인 덕분인지 그녀는 딱히 갤러리들과의 계약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갤러리들이 취하는 모든 연락을 거절할 리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갤러리 대표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는 후문이 미술계에 돌 정도였다.

수차례 메일을 보냈음에도 답신을 받지 못한 수많은 큐레이터들 중 한 사람으로서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서진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를 사로잡은 그녀의 붓 터치엔 알 수 없는 한(恨)이 서려 있었다. 서양적인 유화 물감과 동양적인 정서, 몽롱한 풍경들. 서진의 직감대로라면 제니퍼 안은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빛날 최고의 인재였다.

몇 년 후쯤엔 그녀의 아버지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될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 확신했다. 안환희를 닮지만 않는다면. 서진은 작가 제니퍼 안을 원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제니퍼 안, 하와이에서 나고 자랐대. 이게 안 화백이 말해 준 전부야. 그 양반 입이 귀에 걸려서도 입을 꾹 다물더라.

“형, 나 귀국 좀만 미룰게.”

─왜? 요즘 갤러리 일 나 혼자 고군분투 중인 거 알잖아.

“미안해. 들러야 할 곳이 생겨서.”

─제니퍼 안 때문이면 포기해. 어차피 몸값 올리려는 뻔한 수작이지. 안 화백이 우리랑 함께한 게 몇 년 짼데 다른 데로 가겠어? 그보다는 지금 뉴욕에서 뜨고 있는 김…….

“형,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아. 무조건 잡아야 해. 안 화백 딸이라 해도 이혼한 전 부인이 키웠다며. 그럼 100% 자신할 순 없는 거 아냐?”

─하서진, 이 형 못 믿어 지금?

“조금만 미뤄 줘. 정식으로 요청하는 거야. 다른 곳에 절대 뺏기고 싶지 않아.” (기울기)/

자신이 속해 있는 이안 갤러리의 부대표이자 자신의 형인 규안에게서 스치듯 들은 단어 하나, 하와이. 그 단어 하나가 서진을 뉴욕에서 하와이로 향하게 했다. 몇 날 며칠 동안 그 넓은 하와이 제도를 이 잡듯 돌아다녔다. 예상치 못한 작은 몰로카이 섬에서 드디어 만난 보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체크인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며 서진은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자신을 경계하는 듯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저…….”

체크인을 마치고 낡은 방 열쇠 받아 든 로하는 왠지 발을 떼지 못했다. 그녀에게 딱히 말을 거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진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부담 드리려던 건 아닙니다. 그냥 당신의 열렬한 팬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신 그림엔 늘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해요. 경계가 모호하죠. 그게 스케치에서부터 와 닿아서 차마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제니퍼 안이 아니라 서로하다. 그 단순한 말이 로하의 혀끝에 걸렸다. 그녀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은 서로하였지만 자신의 스케치는 제니퍼 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순적인 것들의 공존. 스스로도 몰랐던 제 스타일이 어쩌면 존재의 모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로하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저는…….”

“실례일 수 있다는 거 압니다. 모든 연락을 다 거절하셨을 정도로 신비주의란 것도요. 하지만 당신의 스케치를 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제 그림이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했다는 말.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이었지만 로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속 시원히 거짓을 말하지도 못하는 제 안의 양심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함께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하면 당연히 거절하시겠죠?”

“그게…….”

“이해합니다. 저 때문에 혹시 그리시던 거 방해 받으셨을까 봐 그게 걱정이네요.”

“어차피 어두워서 더 스케치할 순 없었을 테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저녁은…….”

“저녁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거절하시는 거라고 생각하죠.”

서진이 다시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친절한 말투, 몸에 밴 매너. 그의 와이셔츠에 묻은 진흙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창자가 더욱더 배배 꼬이는 듯했다. 눈앞에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한들 한 입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로하는 간신히 짧은 말을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빨리 그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머릿속에 자리한 풍경이 사라지기 전에 스케치도 정리해야 했고 그려야 할 그림들을 위해 계획도 세워야 했다. 엉망이 된 제 기분 탓에 결과물이 좋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차라리 붓을 잡는 것이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내일 뵙죠.”

서진이 로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로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몸을 돌렸다.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라고?

“몰로카이 섬이요. 다행히 여기선 그림이 잘 그려져요. 신선한 풍경이에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내가 자네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알 거야. 이번 일만 잘 마치면 자네 꿈도 이룰 수 있을 거야, 알지?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방으로 돌아온 로하는 자신을 하와이까지 보낸 장본인인 안 교수와 통화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쓸데없는 일에 흐트러지기엔 이번 여행과 그림에 걸린 것이 너무나도 컸다. 자신이 평생 꾼 하나의 꿈.

─그래서 몇 장이나 나올 것 같은가?

“지금까지 스케치한 것만으로는 한 일곱 장 정도 될 것 같은데…….”

─모자라. 열 장은 나와야 연작이라 할 만하지. 뭐, 귀국해서 완성해도 되겠지. 일단 구상과 스케치 정도만 나와도 괜찮으니까 꼭 열 장 채워 와.

“네, 교수님.”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그 해변에 나가 볼 생각이었다. 아침 무렵의 풍경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그곳에서라면 안 교수가 원하는 열 장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자네가 없으니까 내 그림이 진도가 너무 안 나가. 자넨 정말 재능 있어.

“과분한 칭찬이세요.”

─아냐, 사실 작가로 데뷔해도 충분하지. 이번에 제니퍼 일만 잘 마치면 꼭 갤러리들에게 주선해 줄 테니 귀국하면 포트폴리오 정리하는 것도 잊지 말고.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 제자를 끌어 주는 건 스승의 몫이지. 그럼 한국에서 보자고.

끊긴 전화기를 구석에 내려놓고서 로하는 서둘러 연습장을 펼쳤다. 그 진흙 사이에서도 다행히 스케치는 멀쩡했다. 캔버스에 옮겨 그리며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았다.

갯벌, 진흙, 하늘과 바다가 닿아 있던 몽롱한 꿈의 공간. 연습장에 묻은 진흙이 그리 거슬리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자연은 그 어떤 인공적인 물감보다도 나은 소재였다. 내일 아침엔 그곳의 진흙을 조금 퍼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로하는 다시 연필을 쥐었다.

순간 노크 소리가 방을 울렸다.

「룸서비스입니다.」

「저는 시킨 적 없는데…….」

「옆방의 미스터 하가 보내셨습니다.」

「아.」

로하는 어색하게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그 갯벌엔 자연만 있지 않았다. 가장 이질적인 존재,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인연이라고 믿고 싶은 하서진이란 남자가 있었다. 오로지 스케치만으로 자신을 제니퍼 안이라 알아본 사람. 자신을 피노키오로 만드는 제페토.

제 방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음식을 내려놓는 웨이터를 보면서 로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굳게 먹을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하와이에선 철저하게 제니퍼 안이어야만 했다. 제니퍼 안의 대작(代作)을 하고 있는 중이니 필요하다면 자신 또한 제니퍼 안의 대역이 되어야만 했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아무리 거짓말을 한다 해도 코가 길어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작가 데뷔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간다면 모를까.

한국대 서양화과 교수이자 대한민국 미술계를 쥐고 흔드는 원로 화백 안환희의 외동딸이란 금수저. 가난한 미대 졸업생이자 카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여전히 교수님 스케치나 돕는 서로하란 흙수저. 로하는 테이블 위의 숟가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미치겠네.”

로하는 리조트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렌터카를 바라보다가 타이어를 뻥 찼다. 바람이 반쯤 빠진 타이어는 발길질에도 맥이 없었다. 몰로카이 공항에서 건네받을 때부터 썩 믿음이 안 갈 만큼 낡은 차이긴 했다. 그러나 인상 좋게 생긴 직원은 이게 지금 최선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었고 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로하는 설마 별일 생기겠냐는 마음으로 차 키를 넘겨받았었다. 그런데 결국 설마가 서로하를 잡고 말았다.

지금 시각은 새벽 5시. 거의 날을 새다시피 했다. 엊저녁 스케치 마무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일출을 보기 위함이었다. 환상적이던 공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로지 그 기대감 하나로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은 뒤 연습장과 연필만 들고 간신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런데 펑크라니. 그것도 앞바퀴 펑크라니.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이대로라면 오늘 일출은 포기해야 했다. 이곳은 한국처럼 일 처리가 빠르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난감했다.

빵빵. 그때 로하의 귓가에 경쾌한 클랙슨 소리가 울려 고개를 돌렸다.

“하서진 씨?”

“어서 타요.”

“저기…….”

“의심스럽게 보셔도 타이어 펑크 낸 범인은 제가 아닙니다.”

서진이 제 차의 문을 열고 내리면서 농담을 건넸다. 아침부터 말끔했다. 어제 봤던 것과 비슷하게 슈트를 빼입은 그의 모습에 로하는 어이가 없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연이라도 그와 만나는 것이 불안했다.

“도와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면 더 의심하실까요?”

“의심 안 해요. 하지만…….”

“인정할게요. 스토킹은 한 것 같네요.”

“뭐라고요?”

“어제 뭐라도 좀 먹고 자긴 했어요? 눈이 퀭해요.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그림 그리느라 날 샌 건가요?”

“아…….”

룸서비스를 보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로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서진은 그녀에게 입을 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어느 형태로든 부정 혹은 거절의 말이 나오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지만 그것이 로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어쨌든 어서 타요. 샌드위치도 있으니 차에서 아침 식사도 하고요. 하루 종일 그림 그리려면 배가 든든한 게 좋죠.”

“저기 그게…….”

“코코넛 그로브에 일출 보러 가려던 거 아녔어요? 지금 가야 안 늦어요.”

“아…….”

“원래는 작품의 탄생을 몰래 지켜보려고 했는데 신기한 우연이죠?”

로하는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열어 준 조수석 문과 그를 번갈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 차를 타지 않으면 일정이 하루 밀린다. 더 이상 밀리면 안 될 것 같다.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부르고 그렇게 인연을 켜켜이 쌓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저…….”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할게요. 감히 작가님의 작품 탄생을 이렇게 도울 수 있는 데다가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영광이죠.”

“저는 그림 그릴 때 누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로하는 조수석에 올라타면서 간신히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사실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것을 예전부터 싫어했다. 학창 시절 수학 시간에 딴짓하며 그리던 낙서까지 그러했다.

게다가 이 남자에겐 더욱 보여 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랬다간 다 까발려질 것 같았다. 그녀가 제니퍼 안이 아니라 서로하란 사실까지.

“허락하시기 전까진 멀찍이 떨어져 있을게요. 진짜예요. 절대 방해할 생각 없어요. 작가님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서진이 운전석에 타며 답했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거절은 안 받을게요. 낯가림이 심하신 건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일출을 보기 위해 출발해야 할 때라.”

갑자기 서진의 몸이 로하의 몸을 덮었다. 순간 당황한 로하가 숨을 멈췄다. 몇 초의 순간 수만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서진의 손은 그저 안전벨트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작가님?”

서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연스레 기어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하는 뭔가 억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말이 많아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왠지 코끝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처럼.